백수학
白壽鶴1898. 12. 17 ~ 1974. 12.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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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98년 12월 17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창수동(蒼水洞, 현 창수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19일 영덕군 창수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군 창수면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의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의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평양신학교로 유학 가던 도중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는 평양행을 포기하고 고향 영덕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구세군 참위(參尉) 출신의 권태원(權泰源)과 병곡면(炳谷面) 송천동(松川洞)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 정규하(鄭奎河) 등을 만나 협의하여, 영덕 각지에서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이에 찬성하는 영덕군 내 각 지역의 양반 가문인 권(權)·남(南)·박(朴)·백(白)·이(李) 5개 성(姓)의 문중과 지역유지, 기독교인 등이 모여 3월 18일 영해면 성내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8일 성내시장에는 2,000여 명의 인원이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 소식은 곧 영덕 각지로 퍼져나갔다. 창수면에서도 영해면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3월 19일 이종구(李鐘龜)를 비롯한 오촌동(梧村洞)과 삼계동(三溪洞) 주민들이 영해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신기동(新基洞)에서 마을 구장인 이현설(李鉉卨) 등과 협의한 끝에, 이미 영해면 시위에 참가하는 것은 늦었으니 방향을 돌려 창수면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논을 갈고 있다가 이웃에 사는 김보식(金寶植)의 권유로 창수면 만세운동에 동참하여 창수동에 있는 창수주재소로 행진하였다. 당시 시위대는 200여 명이었는데, 오후 4시 창수주재소에 도착할 무렵 시위대의 규모는 4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시위대는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는데, 일부 군중은 손에 곤봉이나, 도끼 등을 들기도 하였다. 이현설·이수각(李壽珏)·권재형(權在亨)·이현우(李鉉祐)·박치운(朴致雲) 등이 선봉에 나서서 시위 군중을 이끌고 창수주재소로 돌진하여, 앞장서서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이에 동조하여 주재소 건물과 부속건물과 주재소에 비치되어 있던 여러 기물을 파괴하였다. 저녁 무렵 시위대는 자진하여 해산하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 손괴죄, 가택 침입죄, 공문서 훼기죄, 기물 손괴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는데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제1심과 동일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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