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주
白炳疇1903. 4. 2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관련 사건
- · 영변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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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0) 1903년 4월 25일 평안북도 운산군(雲山郡) 동신면(東新面) 니답리(泥踏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백영주(白永疇)를 사용하였다. 1919년에는 평북 영변군(寧邊郡) 영변면(寧邊面) 서부동(西部洞) 김경하(金景河)의 집에서 하숙하며 영변 숭덕학교(崇德學校) 1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3월 8일 영변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영변에서는 이미 1919년 3월 3일에 숭덕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이윤재(李允宰) 등이 영변 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었다. 같은 시기 숭덕학교 학생들 또한 별도로 시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3월 4일 숭덕학교 학생 김창여(金昌汝)가 찾아와 만세시위 참여를 제의하자, 흔쾌히 동의하였다. 영변군 만세시위는 3월 8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아침 영변공립농업학교(寧邊公立農業學校) 학생 왕양준(王良俊)이 하숙집으로 찾아와 자신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있으니, 오후 1시에 숭덕학교에서 종을 치고 합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이 사실을 숭덕학교에 재학 중인 김창여·김상우(金相雨)에게 알리는 등 시위에 참여하는 학교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오후 1시 반, 영변공립농업학교 학생 80여 명이 학교를 빠져나와 만세시위를 시작하였고, 곧 이들과 합류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향하였다. 영변공립농업학교 학생과 숭덕학교 학생들을 합쳐 시위대는 100여 명이 넘었으며, 읍내 시장에 도달하자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합류하여 시위대는 6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에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모자 15명을 붙잡았는데, 이때 함께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모진 조사를 받은 후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 과정에서 미성년자임을 들어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심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렸는데,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불복하고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한 이후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현 중앙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26년 3월 졸업하였다. 이후 강원도 평강군(平康郡)으로 이주하여 동아일보 강원도 평강지국장을 지내면서 여러 사회운동에 동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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