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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

徐正寅

1927. 12. 15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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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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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학생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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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회복연구단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9) 1927년 12월 1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안동면(安東面) 옥야동(玉野洞)에서 아버지 희수(禧洙)와 어머니 이남이(李男伊) 사이에서 1남 3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成)이며, 자는 성길(成吉), 호는 고암(叩巖)이다. 일제가 창씨를 강요하자 대포정인(大浦正寅)을 사용하였다. 김옥규(金玉圭)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안동국민학교(安東國民學校)를 졸업하고 1943년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에 입학하였다. 1944년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3년 1학년 재학 중 여름방학 동안 농촌실태조사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되어 근로 봉사를 하는 도중 학교 선배 권영동(權寧東)·고제하(高濟夏) 등과 시국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어 일제의 패전이 확실하다는 데 인식을 함께 하고 일본군으로 끌려가기 전에 방책을 마련하기로 결의하였다. 개학 후 본격적으로 안동면 동부동(東部洞)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자신의 집 등지에서 시국을 논의하며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 무렵 같은 학교 황병기(黃炳基)·이갑용(李甲龍)·장병하(張炳夏) 등도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청년 학생으로서 역할과 책임감을 느끼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44년 10월 항일비밀결사 조선회복연구단을 결성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은 일제 관공서를 파괴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연합군의 상륙을 지원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방안을 세웠다. 이를 위해 조직 산하에 참모부·연락부·교화부·신풍부·특공부를 설치하여 단원들의 체력 증진을 위해 무술을 익히고 통신 절단 등의 훈련을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의 기밀을 빼내기 위해 우체국 직원을 포섭하고,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벌이기 위해 철도와 전기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접촉하여 활동에 합류시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李相龍)의 손자이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경력이 있는 이대용(李大用)과 김광현(金光顯) 목사 등 안동의 인사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지도를 받았다. 비밀결사에 가입한 후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 학생을 전담하여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세 차례에 걸쳐 경주에서 경주중학교 학생 채순봉(蔡順奉) 등을 만나 조선회복연구단의 결성 취지와 활동 내용을 소개하며 가입을 권유하는 등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수세에 몰리면서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학교의 수업연한을 1년 단축시키는 제도를 시행하여 많은 조선회복연구단 단원들이 졸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은 단원들이 졸업하면 활동이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하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동안 비밀리 교류하고 있던 안동농림학교와 경주중학교 학생들로 결성된 또 다른 항일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도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두 조직이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1945년 2월 두 비밀결사는 안동농림학교의 무기고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한 뒤 안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고 인근의 의성군(義城郡)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제24부대가 출동할 경우 결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무장투쟁계획은 조선회복연구단의 단원들이 주고받은 편지가 문제되어 일부 단원이 체포되어 연기되었다. 두 비밀결사는 1905년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중국 펑톈(奉天)을 점령한 날을 기념하여 육군 기념일로 제정한 3월 10일에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일제가 기념식을 비롯한 여러 행사를 치러 경비가 허술할 것이라는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서 붙잡힌 단원의 조사 도중 단원 명단을 포함한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1945년 3월 1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미결 상태에서 고초를 겪다가 광복을 맞아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45년 광복 이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주한 미군과 경찰을 보조하는 경찰예비대이자 지도 세력의 양성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안동군단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검찰 공무원을 지낸 뒤 민주공화당에 가입하여 정치활동을 하였고, 경상북도문화재 관리위원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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