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박차정

朴次貞

1910. 5. 7 ~ 1944. 5. 27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차정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남 동래(東萊)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동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일신여학교 동맹휴학
  • · 광주학생운동
  • · 광주학생운동 1
  • · 2차 서울 학생시위
  • · 민족혁명당 결성
  • · 만국부녀대회
  • · 남로공작대(南路工作隊)의 곤륜관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漆山洞)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 사이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오빠 문희(文熺)·문호(文昊)와 언니 수정(壽貞), 남동생 문하(文夏)가 있다. 가족은 1918년에 설립된 동래성결교회 교인이었으며, 모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또 외가쪽 당숙인 김두봉(金枓奉)과 김약수(金若水) 등도 이름난 독립운동가였다. 아버지 서거 후 어머니 김맹련은 삯바느질 등으로 어렵게 5남매를 키우고 가르쳤다. 14세 때인 1924년부터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고, 1925년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일신여학교 재학 시절, 여러 차례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1927년 5월 서울에서 근우회를 창립하고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자 1928년 4월 20일 동래에서는 기존 동래여자청년회를 자진 해산하고 5월 19일 근우회 동래지회를 창립하였다. 근우회 동래지회의 창립 초 명단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일신여학교 졸업 전이었기 때문이다. 1929년 3월 9일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5월 경북지방에 기근이 심해지자, 동래에서 신간회 지회, 청년동맹, 노동조합, 근우회 지회의 4단체가 그 해 5월 17일 경북기근구제회를 결성했을 때 서무를 담당한 5촌 당숙 박일형 밑에서 재무를 맡아 보았다. 같은 해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차 전국대회에 김계년(金桂年)과 함께 동래지회 대의원으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경남 전형위원, 33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33인 중에서 선정된 14인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의 책임을 맡았으며, 지회와 도연합회 규칙세칙 제정위원으로도 선임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는 12월 2일부터 3일까지 서울시내 학교에 격문이 뿌려지고 학생들은 만세시위행진을 감행하였다. 배후 조종세력으로 지목되어 근우회의 중심 간부인 허정숙(許貞淑)과 신간회 소속의 오빠 박문희와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후 제2차 시위를 계획하였다. 1930년 1월 15일 이화·숙명·배화 등 11개교의 여학교가 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시 일경은 근우회를 배후 조종 세력으로 지목하고 정종명, 허정숙 등과 함께 붙잡았다. 그 후 2월 중순까지 투옥되었다가 서대문경찰서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다시 동래에서 검거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투옥과 석방을 되풀이하였다. 1930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피신하였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부 위원이 되었다. 1931년 3월 김원봉과 결혼하고,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어 활약하였다. 1932년 베이징에서 난징(南京)으로 옮긴 뒤 김원봉과 함께 국민당 정부의 협조하에 1932년 10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하고 임철애(林哲愛)라는 가명으로 여자부의 교관이 되었다. 1935년 7월 ‘통일대당’ 결성을 위해 김원봉 주도로 의열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을 통합해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에 1936년 7월 16일 이청천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 난징조선부녀회를 결성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민족혁명당은 중국군과 항일공동전선을 펴기 위한 준비로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과 함께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하였다. 한커우(漢口)에서 개최된 만국부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창사(長沙)로 이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특사로 파견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고, 중국과 조선, 일본 민중의 연합과 일본 혁명대중들의 혁명전쟁을 촉구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였다. 또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임철애(林哲愛)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 실었다. 1938년에는 『조선민족전선』 제3호(1938. 5. 10)와 제5, 6호(1938. 6. 25)에 「조선부녀여부인운동(朝鮮婦女與婦女運動)」이라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중국의 전면 항일전쟁이 시작된 시점을 맞아 우리 부녀자들도 일치단결하여 조국의 자유 회복, 동아시아의 화평, 인류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자, 22명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9년 말 의용대 본부는 대일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화북 진출을 결정하고 후난(湖南)과 광시(廣西)의 의용대부터 차례로 북상시켰다. 이 중 엽홍덕(葉鴻德)이 이끄는 남로공작대원(南路工作隊員)들이 북상하면서 곤륜관 전투에 참여하고 적의 진지 앞에서 반전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곤륜관 전투에 참여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1942년 12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으며, 남편 김원봉은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곤륜관 전투에서 다친 상처와 지병인 관절염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대외 활동은 거의 할 수 없었고, 시와 소설로 해방된 조국을 그리다가 1944년 5월 27일 34세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유해는 충칭 강북구 화상산(和尙山)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2월 남편 김원봉이 환국하면서 김원봉의 고향 경남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이때 피묻은 군복과 군모를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은⋮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