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선
宋秉璿1836. 8. 24 ~ 1905. 12.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신사봉사(辛巳封事)
- · 중화전 주차(中和殿奏箚)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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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36년 8월 24일 충청남도 회덕현(懷德縣) 석남(石南, 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아버지 송면수(宋勉洙)와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 李氏) 사이에서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17대손이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이다. 선조인 송시열의 의리론를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었다. 9세 때부터 백부 송달수(宋達洙)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 숙부 송근수(宋近洙)와 외숙부인 이세연(李世淵)에게 수학하였다. 송달수는 조선 후기 성리학계를 이분하였던 호락(湖洛)논쟁을 떠나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연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면서 순수 학문적 자세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송근수는 1882년 좌의정 재임 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교섭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였고,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발표되자 “전통 질서 중의 하나인 복제(服制)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 위정척사의 정신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외숙 이세연(李世淵)은 송달수·송근수와 교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선조 이선(李選)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송시열과 함께 물러났던 인물이었다. 선대로부터의 유대관계와 당대의 인척관계로 이세연은 송달수·송근수와 교류하면서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의 편수 작업에 참여하는 등 학문 활동을 같이하였다. 1858년부터 선조들의 문집 편수작업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가학을 계승하는 한편, 송달수와 송근수 문하에서 박성양(朴性陽)·이상수(李象秀)·정해필(鄭海弼)과 조병덕(趙秉悳)·윤필현(尹弼鉉) 등 성리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의식 확대, 다양한 저술 활동, 위정척사 사상을 정립하게 되었다. 1865년 5월 만동묘(萬東廟)가 철폐되자 “『춘추(春秋)』를 읽을 만한 곳이 사라졌음”을 한탄하면서 그 해 5월 『송자대전수차』 간행 작업을 시작하였다. 『송자대전수차』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 중에서 난해한 구절을 뽑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쓴 것이다. 만동묘 철폐의 시점에서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의도는 송시열의 의리론을 계승하는 동시에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해 6월 이종사촌형 김영응(金永膺)과 역사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동감강목(東鑑綱目)』을 저술하기 위한 기초작업의 일환으로 『춘추』와 『통감강목』에서 제시된 의리사관(義理史觀)을 정립하여 역사의식을 체계화하고 국가의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였다. 1866년 충북 옥천(沃川)의 오산(梧山)으로 이주하였고, 1867년부터 옥천 각신리(覺新里)의 이지당(二止堂)에서 경의(經義)를 강론하면서 문인·사우와 잦은 접촉을 하였다. 1889년 8월 경북 성주(星州)의 기국정(杞菊亭), 1893년 4월 충북 영산(永山, 현 영동)의 풍천당(楓川堂), 1898년 9월 충남 금산(錦山)의 용강서원(龍江書堂), 1901년 4월 전북 임피(臨陂, 현 군산)의 낙영당(樂英堂), 1905년 3월 전북 임피의 고암서원(考巖書院) 등지에서 강회를 개최하였다. 또 1901년 4월 충남 서천(舒川)의 풍옥헌(風玉軒), 1901년 9월 성주 노강서원(老江書院) 등지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기도 하였다. 1891년 4월 영동(永同)의 빙옥정(冰玉亭)에서 강론하였고, 그 해 7월 무주(茂朱) 구천동(九千洞)의 서벽정(棲碧亭)을 중건하여 여기에서 매년 봄·가을 선비들을 모아 강학하였다. 또 1897년 4월 무주군수 조병유(趙秉瑜)가 고향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강론을 청하였으며, 1901년 9월 경남 거창(居昌)의 병선서재(屛山書齋), 1904년 7월 경북 지례(知禮, 현 김천)의 세심대(洗心臺) 등지에서 강론 활동을 펼쳤다. 특히 전북 임피 낙영당에서 강회 때에는 화서학파의 거두이자 태인의병을 일으킨 최익현(崔益鉉)이 참석하여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1891년 4월 임피향약, 1905년 5월 회덕향약 등 향약을 통해 지역사회의 결집을 주도하였다. 1867년 옥천 이지당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충청 지역은 물론 전라·경상 등지에서 유림들과의 접촉을 통해 위정척사 운동의 여론 확산을 도모하면서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그 결과 143명의 사우들과 1,100여 명의 문인들을 규합하는 등 전국 규모의 문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문인 규합은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자 문인들의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 제자를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유림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탱해 온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전파하고,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사상은 「벽사설(闢邪說)」(1870)과 『근사속록(近思續錄)』(1874) 등의 저술을 통하여 체계화되었다. 「벽사설」에서 이단(異端)의 개념을 오도(吾道)와 반대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오도 즉 국가의 기본질서이고, 배척해야 할 것은 양묵(楊黙)의 학(學)을 비롯한 불교와 천주교 등은 이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주자(朱子)가 엮은 『근사록(近思錄)』과 같이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김장생·송시열 다섯 학자의 학설과 유훈을 채록한 『근사속록』에서 보다 강화되었다. 여기에서 도학(道學)의 견해를 바로 세우고 성리학의 정통성을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위정척사 사상은 송근수의 「출처지의(出處之義)」와 「척화의(斥和議)」 등을 논의하면서 보다 실천적인 방안으로 모색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즈음 송근수와의 서신에서 일본이 제시한 강화도조약의 침략성에 대해 간파하였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결국에는 한국의 망국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군사력 양성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대정부 건의 방법으로 20여 차례의 상소를 통한 위정척사운동을 펼쳤다. 1877년부터 태능참봉(泰陵參奉)·서연관(書筵官)·경연관(經筵官) 등을 시작으로 1903년까지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거부하였다. 그러나 무분별한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정부의 미온적 대처에 일침을 가하였다. 1879년 국왕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는 「사소명잉청무성학소(辭召命仍請懋聖學疏)」를 통하여 “성학에 힘써 현량한 인재를 육성하고 이들을 국가의 요직에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상소를 통해 내수의 정비, 강력한 군사력 배양, 외세의 척결을 줄기차게 주장하여 국정에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신사척사운동이 한창이던 1881년의 「신사봉사(辛巳封事)」 8개조이다. “성리학의 정진, 언로의 개방, 국가정통성 확립, 국가기강 확립, 재정절약, 인사정책 일신, 조세경감, 왜세척결” 등 8가지 현안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를 통해 척사의 대상으로는 왜와 사교를 꼽는 등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시각에서 일제를 비롯한 서구사상 일체에 대한 척결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은 문인과 당대 지식인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실례로 화서학파의 김평묵(金平黙)은 “선생의 「신사봉사」가 윤리강상(倫理綱常)을 부지하게 하였고, 서양의 오랑캐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라고 하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단을 역설하는 동시에,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한 10가지 급무를 제시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 국왕을 직접 대면하여 국망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10가지 급무인 ‘중화전 주차(中和殿 奏箚)’는 대내문제로 “국가질서 확립과 군사력 확보”, 대외문제로 “이단 세력에 대한 응징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각국 공사관에 변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사주를 받은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 의해 12월 28일 대전 자택으로 압송되었다. 그 해 12월 29일 70세의 노구로 유소(遺疏)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상소이자 제자들에 대한 행동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음독한 후 후손과 제자들을 모아 “도(道)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와 함께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1906년 2월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다. 당시 신문지상에서는 이 죽음을 “의(義)를 취한 순절(殉節)”이라고 애도하였고, 이관구(李觀求)는 1917년 황해도 유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삼현묘(三賢廟) 건립을 추진하면서 최익현(崔益賢)·유인석(柳麟錫)과 더불어 배향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마음 속 인물로 자리 잡았다. 당대 유림들은 “송병선의 순국을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 확산되었다”고 하였다. 문인들 가운데 정기연(鄭璣淵)·이병운(李柄運)·박병하(朴炳夏)·안규용(安圭容)·장기홍(張基洪)·노종용(盧種龍)·조종덕(趙鍾悳)·조용승(趙鏞昇) 등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을사늑약 파기운동에 참여하거나 자결·은둔 등의 방법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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