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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규

白一圭

1880. 3. 11 ~ 1962.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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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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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증산(甑山)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증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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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7) 1880년 (음)3월 11일 평안남도 증산군(甑山郡) 성도면(聖陶面) 오화리(五和里)에서 태어났다. 백인(白麟)과 송씨(宋氏)의 둘째 아들로, 형은 백낙조(白樂祖)이다. 백윤조(白允祖)가 본명이었으나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백일규로 개명하였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백일규(白日奎)를 사용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청년시절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로 활동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의 실패와 함께 현실을 타개할 방안을 찾던 중 증산에서 공립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강명화(姜明化)가 하와이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따라 가기로 결심하였다. 1905년 5월, 강명화(姜明化)의 가족과 평양의 황마리아 가족, 박재형(朴在炯) 등과 함께 진남포(鎭南浦)를 떠나 하와이로 갔다. 이들은 하와이에 도착하여 호놀룰루(Honolulu) 인근의 에와(Ewa)농장에서 사탕수수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매일 10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원명(鄭元明)·윤병구(尹炳球) 등이 조직한 에와친목회에 가입하여 일본 화폐 배척운동을 전개하였고, 1906년에는 서기를 맡았다. 이때 신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5월부터 『친목회보』를 발간하였다. 1906년 8월, 학업을 위해 하와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고 이즈음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907년 1월 문양목(文讓穆)·장경(張景)·방사겸(方四兼) 등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대동보국회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성격의 애국단체로 인민교육의 확장, 인민실업의 흥기, 인민자치의 창설을 3대 강령으로 내세우고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더불어 기관지로 『대동공보(大同公報)』를 발간하였다. 1908년 대동보국회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문양목의 뒤를 이어 『대동공보』의 주필 겸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이때 『대동공보』를 통해 국내 의병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논설을 썼으며, 박용만(朴容萬)이 덴버(Denver)에서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할 때 한인들의 참가를 독려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이 스티븐스(D.W.Stevens)를 처단하고 체포되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인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관하였고, 여기서 두 사람의 재판 후원을 위해 재판정권위원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한인공동회에 참여한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 인사들과 함께 전 미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특별의연금을 거두어 두 사람의 재판에 보탰다. 재판이 마무리 되던 12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신흥우를 만나 잡지 『자유보』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1909년 『자유보』는 창간되자마자 중단되었고, 학업을 위해 9월 네브라스카(Nebraska)로 이주하여 헤이스팅스공립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년 6월에는 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대학(Hasting College)에 유학 중이던 박용만이 정한경(鄭翰景) 등과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의 수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 미국에 와있는 한인 학생들은 학생 조직의 결집을 위해 헤이스팅스대학에서 한인학생대회를 개최하였다. 1913년 6월에 열린 이 회의를 통해 학생 대표들은 한인학생동맹을 결성하고 『한인학생평론(The Korean Student’s Review)』라는 영문 잡지를 창간하였고, 이때 발행인을 맡았다. 1914년 7월 『신한민보』의 주필 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의 요청으로 주필을 맡게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게 된지 6개월 여 만인 1915년 1월 사임하고 버클리(Berkeley)의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18년 5월에 졸업하였다. 학업을 지속하면서도 1916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1917년 북미지방총회 부회장과 대의원회 의장, 1918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 겸 중앙총회 대표원 의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 하고, 미 대통령 윌슨(W. Wilson)의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하자 미주 한인들은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이에 미주 한인들은 파리강화회의와 뉴욕에서 열리는 소약국(小弱國)동맹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고, 이를 위한 자금 모집에 나섰다. 1919년 1월 홍언(洪焉)의 후임으로 다시 『신한민보』 주필이 되었다. 3월 9일 현순(玄楯)이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전보를 보내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열고 독립선언 이후 재미 한인들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독립의연 모집 규정’과 ‘인구 등록 규정’을 반포하여 미주 한인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외교부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두고, 서재필(徐載弼)을 외교 고문으로 선임하여 한국통신부 활동을 후원하였다. 그해 4월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상하이(上海)로 떠나자 중앙총회장 대리를 맡아, 미국과 영국 등 4개국 정부 수반과 대사에게 한국 독립 후원을 요청하는 공첩을 발송하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신한민보』에 「한국경제의 역사」를 연재하였고, 이 글을 모아 1920년 2월 8일 『한국경제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미주 한인 학교의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19년 9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선거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나 1920년 1월 사임하였다. 1921년 3월 김현구(金鉉九)·강영승(康永昇)과 함께 『신한민보』의 명예기자로 선임되었고, 1923년에는 다시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았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미주 한인들의 경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동아일보사가 해외동포 위문금을 보내주기도 하였는데, 이때 이대위(李大爲) 등과 위문금 처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 대한인국민회 서기에 보임되었고, 1924년부터 1925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최진하(崔鎭河)를 도와 법무원과 학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이 되었고, 1935년 3월까지 총회장을 맡아 어려운 시기의 미주 지역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1928년 6월 대한인국민회를 지켜온 이대위 목사가 사망하자, 장례집행위원이 되어 장례 의연금을 모아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각지의 한인대표들과 함께 ‘내지학생운동응원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11월에는 분열된 미주 한인 사회를 통합하고 임시정부로 독립운동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자는 기치 하에 나성한인공동회(羅城韓人共同會, 현 로스엔젤레스)와 중가주한인공동회, 묵경한인청년회(墨京韓人靑年會, 현 멕시코시티)를 합쳐 미주한인연합회를 발기하고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미주한인연합회를 통한 한인사회 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3년 3월 18일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총회가 미주한인연합회를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일 김규식(金奎植)이 미국에 오면서 대한인국민회는 한국대일전선동맹에 가입한다는 이유로 미주한인연합회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는 미주한인연합회 창설을 주도한 입장에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미국 내 진보적 성격의 한인 유학생들의 입장에 동조하고 그들을 지원하자 보수적인 대한인국민회 내 인물들의 견제도 받았다. 결국 1935년 3월, 총회장에서 사임하고 대한인국민회 활동에서 물러나 캔자스시티(Kansas City)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동양식품점을 운영하였다. 1942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고, 그해 12월 북미대한인국민회 대표대회 나성지방회 대표원으로 참가하였으나 곧 사퇴하였다. 1943년 10월 6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북미총지부 기관지 『독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5년 6월 사장 겸 주필, 총무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7년 1월에서 1949년 2월까지 하와이에서 『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중앙감찰위원을 지내면서 『신한민보』에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과 화합을 위한 글을 기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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