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연준
孫燕俊1902. 6. 3 ~ 1950. 9.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애양원교회
- · 예수교장로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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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902년 (음)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칠원면(漆原面) 구성리에서 아버지 손종일(孫宗一)과 어머니 김은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적명은 손연준(孫燕俊)이지만, 주로 손양원(孫良源)이라는 이름을 썼고 재판을 받을 때는 대촌양원(大村良源)이라는 이른바 창씨명도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08년 기독교에 입신한 아버지를 따라 함안 칠원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이 해부터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배웠다. 1913년 4월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재학 중인 1915년 학교에서 시키는 궁성요배를 거부하여 퇴학을 당했다. 그 후 호주장로회 선교사 맥래(F. J. L. Macrae, 孟浩恩)의 항의로 다시 복학하여 수학, 1917년 3월 칠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10월 선교사 맥래에게 세례를 받고, 1919년 4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아버지 손종일 장로가 함안지역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구속되자 학교를 자퇴하고 귀향하였다. 1921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의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 야간부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23년 12월 칠원교회 집사에 임명되고, 1924년 1월 옥열교회에 다니던 정양순(鄭良順)과 결혼하였다. 1926년 4월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고, 경남노회에서 외지 전도사에 임명되어 부산 감만동교회, 울산 방어진교회, 양산교회 등을 순회하며 목회하였다. 1929년 3월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하고, 1935년 4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7년 10월 장남 손동인과 칠원교회 엄주신 장로의 쌍둥이 아들 엄문섭·엄무섭 형제가 신사참배 거부로 칠원보통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1938년 3월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5월 제41회 경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아 경남노회 부산시찰 순회 전도사에 임명되었다. 1939년 7월 전남 여수 애양원교회를 담임하였다. 1940년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에 「조선기독교도 불온분자 일제 검거령」이 내려지자, 9월 25일 ‘신사참배 거부 및 말세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여수경찰서에 구속되었다. 1941년 7월 기소를 위해 광주구치소로 이감되었고,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43년 5월 17일이 만기 석방일이었지만 풀려나지 못하고, 5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예방구금 결정을 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9월 16일 항소가 기각되었다. 그리하여 경성구치소를 거쳐 1943년 11월 청주보호관찰소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1945년 8월 17일 광복으로 석방되어 귀가하기까지 옥고를 겪었다. 1946년 2월 마산교회에서 열린 제47회 경남노회 속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여수 애양원교회를 담임하였다. 1948년 10월 아들 손동인·손동신 형제가 ‘여순 사건’으로 순교했지만, 아들을 살해한 학생이 검거되자 그를 양아들로 삼아 구출하였다. 1949년 4월 제35회 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여 국기배례 문제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고, 5월 총회 대표들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여 해결했다. 6·25전쟁 중에도 피난을 거부하고 목회 현장을 지키다가 1950년 9월 13일 북한 인민군에게 끌려가 여수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고, 9월 28일 여수 미평의 과수원에서 퇴각하던 인민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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