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석
徐邰晳1884. 6. 17 ~ 1943. 6.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암태소작(인)회
- · 조선공산당(춘경원당)
- · 조선농민총동맹
포상 정보
- · 애국장(2003)
관련 사건
- · 암태도 소작쟁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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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3) 1884년 6월 17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암태면(巖泰面) 기동리(基洞里)에서 아버지 서두근(徐斗根)과 어머니 박남리(朴南里) 사이에서 태어났다. 7세부터 18세까지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동학계열 신종교 중 하나였던 제우교(濟遇敎)를 믿었다. 29세였던 1913년 암태면장에 임명되어 1919년 11월까지 그 직을 유지하였다. 1924년에 암태도소작쟁의를 주도하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인 그 해 11월 면장직을 사임하고 12월 25일부터 1920년 2월 25일까지 2개월간 펑톈(奉天)·다롄(大連)·뤼순(旅順) 등지를 여행했고, 서울에서 만주보민주식회사(滿洲保民株式會社)라는 회사 설립에 관여하였다. 이 회사는 표면상 만주 한인들로 하여금 토지를 매입하고 개간하고 주택을 건설해 입주시키는 등 생활 안정을 취하는 것을 돕기 위해 제우교 신도들이 설립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친일적 단체였지만 이에 대해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채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발기 비용을 3백원 출자하는 등 회사 설립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같은 해 3월 28일 목포에서 제우교 전도사였던 표성천(表聲天)으로부터 태극기와 독립을 촉구하는 격문 200매를 전달받았다. 만세운동 1주년 기념으로 3월 29일 태극기를 목포 송도(松島)공원과 철도정거장 등에 붙이고 ‘대한독립기념 축하 경고문’을 목포 시내에 살포하고 전주보통학교에도 발송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출옥 이후 행적은 불명확하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왔다는 설이 있으며, 1922년 4월에도 홍성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하는 활동에 가담하였다가 붙잡혀 조사를 받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1923년에는 김상옥의 폭탄의거와 연관해 잠시 검속되기도 했다. 이후 농민운동에 참여하여 박복영(朴福永)과 더불어 암태소작인회 회장으로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암태도 출신으로 당시 목포에 살던 3만 석 부자로 알려진 지주 문재철 농장의 소작인이 벌인 1923~24년 소작쟁의를 말한다.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조직된 암태소작회는 지주 문재철에 대해 7할 또는 8할의 소작료를 4할로 내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암태도는 퇴비의 자원이 빈약하고 육지의 하천 유역처럼 토지가 비옥하지 않으므로 농사비용과 노동력이 더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재철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추수 후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불납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러자 암태도 주재 경찰은 물론 목포의 일본인 경찰서장이 경찰을 대동하고 시위 순찰을 하는 등 소작인들을 위협하였고, 문재철도 사람을 시켜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거나 개별적인 협박을 하였다. 이에 소작회는 순찰대를 조직하고 회유된 소작인에게 폭력으로 응징하면서 불납운동을 지속시켰다. 그러던 중 한 해를 넘겨 1924년 3월 소작회 회장으로서 면민대회를 주재하여 지주 문재철을 규탄하고, 자신들의 요구에 불응할 경우 문재철 부친의 송덕비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소작쟁의 문제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 아래 언론과 노동·농민단체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여러 언론에서는 연일 암태도 소작쟁의가 보도되었다. 암태소작회에서도 그 해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농민대회(全朝鮮農民大會)에 제소하기 위해 박응언(朴應彦)·손학진(孫學振) 등 소작회 다른 간부들과 함께 서울로 가고자 했으나 대전역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아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4월 20일 서울에서 창립한 조선노농총동맹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암태소작회에서는 4월 22일 수곡리에 있는 송덕비를 파괴하였고 그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때 다른 소작회 간부들과 함께 문재철 측 사람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였고 경찰에 붙잡혀갔다. 이에 암태청년회는 6월 2일 1천여 명이 모인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목포로 건너가 항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고 농성단 400여 명을 목포로 보냈다. 6월 4일에 이들은 목포경찰서 마당에서 밤을 새웠고 다음 날은 법원 마당에서 또 다시 밤을 새웠다. 6월 6일에는 응원을 위해 모인 200여 명과 함께 법원 마당에서 검찰국을 상대로 구속자 석방 시위를 하였다. 장기간 걸친 농성과정에서 7월 8일에는 암태도의 600여 명이 후속으로 출발하여 법원마당에 모여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7월 11일에는 목포 북교리의 문재철의 집으로 몰려가는 등 투쟁을 지속하였다.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목포는 물론 서울과 광주 등지의 한인 변호사들이 재판에 무료 변론를 자청하였고 서울 천도교회에서는 지원강연회를, 평양노동동맹(平壤勞動同盟)에서는 지원금을 보내왔다. 그 결과 7월 14일 목포 경찰서장 나카지마(中島)는 26명의 구속자에 대한 석방을 약속하고 구속자를 석방하였다. 그러나 재판에 계류되어 있던 다른 12명과 함께 광주 본청으로 이송되었다. 1년간 지속된 암태도 소작쟁의는 결국 8월 30일 목포경찰서장실에서 지주 문재철과 소작회를 대표한 박복영 사이에 소작료 조정 약정서가 교환되면서 종료되었다. 약정서의 주요 내용은 소작료는 4할, 1923년 미납소작료는 3년간 분할 상환, 구금 중인 인사는 공판정 쌍방 고소 취하 등이었다. 192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 상해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옥고를 겪던 중 같은해 12월 6일 보석으로 잠시 풀려났다. 12월 22일 암태청년회관에서 열린 무안·목포 청년연맹 발기회의 사회를 맡고 임시의장에 선출되었다.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다시 옥고를 겪었다. 이후 1926년 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전라도 대표 및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9월에는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인 1928년 4월 붙잡혀 3차 투옥되었고, 1930년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감옥 안에서도 러시아어를 공부하며 옥중생활을 견디었다. 1931년 10월 하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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