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태
徐元泰1889. 3. 1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6)
관련 사건
- · 원산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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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6) 1889년 3월 15일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남촌동(南村洞)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거주지에서 어업(漁業)에 종사하였다. 1920년 9월 23일 함남 원산부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원산부에서 전개된 제2차 만세운동은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기회로, 김장석(金章錫)·김상익(金相翊) 등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추진한 것이다. 김장석은 김상익·조병철(趙秉喆)·이용구(李容九)·이용훤(李容暄) 등과 향후 계획을 협의한 후 역할분담을 하였다. 8월 21일 김장석은 동지들과 김상익의 집에 모여 미국 국회의원단에게 보낼 환영문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의원단 환영,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한국인의 불만 폭로, 미국의원단의 현명한 판단과 협조 등이었다. 그리고 거사일을 9월 23일로 정하였다. 김상익은 이 문건을 가지고 상경하여 각계 요로에 전달하고, 나머지 동지들은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김상익은 상경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9월 23일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원산의 만세시위 준비는 일제 경찰의 감시로 인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였다. 1920년 9월 23일 저녁 원산의 남산교(南山橋) 아래에서 산보하던 최종빈(崔鍾濱)·최종현(崔鍾炫)·이용구 등이 먼저 ‘독립만세’를 외쳤다. 삽시간에 남산교 일대는 ‘독립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원산청년회관에 있던 김장석·감상익은 남산교의 함성을 듣고 동지들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여기에 원산보광학교(元山保光學校)와 원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백여 명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때 송일봉·최문환 등과 함께 북촌동(北村洞) 경찰관파출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용구 등이 경찰관파출소와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라고 외쳤다. 이에 군중을 이끌고 경찰관파출소와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이어 시위 군중을 이끌고 원산 시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 경찰이 총칼로 탄압하여 현장에서 2명이 사망하고 주도자 약 50명이 붙잡혔다.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원산경찰서에서 58일간의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1920년 12월 2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1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함흥감옥 원산분감에서 옥고를 겪었다. 같은 해 10월 23일 만기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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