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석
徐永錫1891 ~ 19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평안남도 강서군(3.4)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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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77)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이인리(里仁里) 출신이다. 1919년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27세로 1891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 모락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院場里)와 강서군(江西郡)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 사이에는 5일장인 모락장이 섰다. 두 지역은 각각 대동군과 강서군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장날에는 서로 왕래가 잦았다. 장로교 소속 교회 네 곳도 서로 인접하여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원장리에는 원장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로부터 남쪽 3km 지점 산수리(山水里)에는 산수리교회가 있었다. 상사리에는 반석교회(盤石敎會)가 있었고 여기서 10km 떨어진 반석면 반육리(班六里)에는 사천교회(沙川敎會)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 교회들이 연합하여 1919년 3월 4일 일으킨 모락장 시위는 수원(水原) 제암리(提巖里) 투쟁과 함께 만세운동의 대표적인 유혈 참극이 벌어난 곳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모락장 만세시위 계획은 반석교회 장로이며 사립반석학교(私立班石學校)를 설립 운영하던 조진탁(曺振鐸)이 3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거행된 독립선포식과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몇 장의 독립선언서를 얻어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조진탁은 귀가 길에 원장교회에 들려 장로인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玄九)를 만나 평양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원장교회와 반석교회는 물론 산수교회와 사천교회까지 연합하여 원장리 장날인 3월 4일 대대적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고지형·윤상열·차현구는 곧바로 원장교회 부설 사립합성학교(私立合成學校) 교감 임이걸(林利杰)와 산수리교회 조승익(曺承翊)에게도 시위 준비를 당부하였다. 차현구는 반석교회 최능현(崔能賢) 장로와 백이옥(白履玉) 영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최능현은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 목사에게도 거사 계획을 알렸다. 송현근 목사는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여 모락장에서의 별도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을 비롯한 10여 명이 검거되었고, 송현근은 조진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거사일인 3월 4일 10시, 원장리 합성학교 운동장에서는 천여 명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는데, 사전에 만세시위 계획을 알고 적극 참가하였다. 독립선포식이 거행되었는데, 원장교회 차병규(車炳奎) 장로의 기도로 시작하여 지석용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임이걸이 독립선포식의 필요성에 대해 40분간 연설하였다. 그리고 평화적 시위임을 선언하고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어 앞세우고 나팔수를 선두로 하여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시장을 향해 함께 나아갔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합성학교 교정으로 돌아올 때는 많은 군중이 뒤따랐다. 이때 최능현과 송현근이 모락장 시위는 사전 발각되어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알리고 헌병대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자고 호소하였다. 시위 군중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헌병대가 있는 모락장으로 향하였다. 모락장에 거의 도착하여 언덕길을 넘으려 하자, 사천헌병분견소장 사토(佐藤實太郞)와 헌병보조원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격분한 시위 군중들과 함께 격렬히 저항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사토는 분견소에 몸을 숨기고 계속 총을 쏘았고 헌병보조원들은 도망갔다. 이날 헌병대 발포로 시위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9명이었고 부상자도 40여 명을 헤아렸다. 분노한 시위 군중들은 분견소에 불을 지르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을 구출하는 한편으로 사토와 헌병보조원 2명을 처단하였다. 만세시위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군 헌병대가 본격적으로 증파되어 폭력적 진압과 함께 시위 주도자와 적극 가담자에 대한 대규모 체포 작전을 전개하여 4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그리고 이 중 49명이 평양 검사국에 송치되었는데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유는 모락장 시위에서 일제 헌병을 살해하고 헌병분견대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1심을 거치고 1919년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살인죄, 방화죄,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되었다. 장기간 옥고를 겪다가 1913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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