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하
朴鍾夏1883. 4. 4 ~ 1964. 5.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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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3년 4월 4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리(新里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면서 영덕군 창수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9일 창수면 만세시위는 전날인 18일 영해면(寧海面) 성내시장 3월 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전개되었다. 3월 18일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19일 영양군(英陽郡) 출신의 양반 이종구(李鐘龜)는 주민들을 규합하여 영해면 성내시장 만세운동에 동참하고자 하였다. 이때 창수면 신기리(新基里) 마을 구장인 이현설(李鉉卨)과 이수각(李壽珏)이 영해면으로 가지 말고 창수면에서 만세운동을 따로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창수면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신기리에는 당시 도로공사로 인하여 전답을 강제로 수용당한 주민들 사이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가던 차에, 마을 구장 이현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계획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신기리 주민이 시위대에 참여하고, 또 창수리로 행진하는 와중에 속속 합류하는 인원이 늘어나면서 창수리에 소재한 주재소에 도착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시위대가 약 400명으로 늘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시위 군중은 각각 태극기를 손에 들거나, 곤봉이나 도끼, 돌 등의 무기를 들기도 하였는데, 이때 함께 동참하여 손에 곤봉을 들고 행진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앞장서서 시위 군중을 이끌고 창수주재소로 돌입하였다. 곤봉으로 주재소 건물을 공격하여 부수고, 주재소 내 각종 기물과 공문서를 훼손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날의 공격으로 인하여 창수주재소 내에 비치되어 있던 총 3정과 대검 2자루, 일제 경찰의 가구, 의류, 식기 등도 모두 파괴되었으며, 주재소 청사와 기숙사, 3동의 창, 벽, 천장, 게시판, 화장실, 목욕탕 등이 파괴되었고, 청사에 딸린 유치장의 기둥과 주재소 뜰의 수목, 기타 서류, 기구 또한 거의 파손되었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파괴하고 만세를 부른 후, 오후 7시 무렵 자진해서 해산하였다. 시위가 끝난 후 집으로 귀가하였는데, 이후 경찰의 검속으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공무집행방해죄, 건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기물 손괴죄, 상해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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