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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태

朴鍾泰

1887. 2. 3 ~ 1959.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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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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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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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9)

관련 사건

  • · 영덕군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9) 1887년 2월 3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도곡리(陶谷里)에서 태어났다. 자료의 한계로 자세한 성장 배경과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영덕군 영해면(寧海面)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시작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영덕군에도 전파되었다. 영덕의 만세운동은 북장로교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3월 초 평양(平壤)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귀향하였다. 김세영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과 병곡면(柄谷面) 송천리(松川里)교회의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만나 만세운동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여 3월 18일의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권태원은 일족인 권(權)가와 접촉하였으며, 남효직(南孝直)과 남여명(南汝明) 등 유력 양반들의 시위 참여도 독려하였다. 정규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모아서 시위를 모의하였다. 3월 18일 정오 영해의 성내(城內)시장에 정규하 등이 태극기를 지니고 진입하였고, 1시에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다. 2,000여명 이상의 군중이 열띠게 호응하였는데, 이때 이 인파와 동참하였다. 시위군중은 영해경찰관주재소, 영해공립보통학교, 영해우편소, 영해면사무소 일대를 돌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영해의 시위는 19일까지 이어졌으며 병곡면(柄谷面)과 창수면(蒼水面)으로도 번져나갔다. 영해의 시위는 규모도 컸거니와 주재소, 면사무소, 공립보통학교, 우편소 등이 지붕과 건물만 남는 수준으로 파괴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시위대는 해산을 명하는 경찰관을 무장해제시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도중에 진압을 위해 왔다가 군중의 기세에 눌려 퇴각하는 영덕경찰서장과 경찰들을 구타하고 감금하기까지 하였다. 시위는 영덕과 포항(浦項)에서 일본군과 헌병대가 파견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후 붙잡혀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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