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원
朴濟元1888. 3. 13 ~ 1964. 10.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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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8년 3월 13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고,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영덕군에서도 일어났다. 3월 18일 영해면 성내(城內)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김세영(金世榮)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북장로교 교회 조사(助事)였던 김세영은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로 유학길에 올랐으나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세영은 친분이 있던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과 병곡면(柄谷面) 송천리(松川里) 교회의 조사 정규하(丁奎河)에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영덕 지역에서도 거사를 벌일 것을 제안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도들을 모으고, 유력 양반가와 접촉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규하의 제안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18일 정오 정규하·남효직(南孝直) 등은 미리 준비한 대·중·소형의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안고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오후 1시 2,000~3,000명의 시위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군중은 영해경찰관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우편소·심상소학교·면사무소를 돌며 시위를 하였다. 시위는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의 지붕과 기둥만 남을 정도로 건물이 파괴되었고, 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퇴각하였다. 영덕에서 경찰서장과 경찰 몇 명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출동하였지만 오히려 시위대에게 쫓겨 도망을 치다가 붙잡혀 구타와 감금을 당하였다. 시위는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으며 포항과 대구에서 시위 진압을 위한 응원 병력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현장에서 8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하였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동지들과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공무집행 방해죄, 건조물 손괴죄, 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6월로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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