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손성한

孫聖漢

1928. 2. 10 ~ 1945. 6. 8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손성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안동(安東)학생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안동농림학교
  • · 명성회
  • · 조선회복연구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28년 2월 10일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금곡동(金谷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과 1941년 4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학생들도 근로봉사와 군사교육을 강요당하였다. ‘근로보국(勤勞報國)’이라는 명목으로 농사 실습과 노력 동원이 강요되었고, 군사교육으로 집총훈련(執銃訓練)과 활공기(滑空機) 연습, 공습에 대비한 철도훈련(鐵道訓練), 총검술(銃劍術) 훈련, 군인칙령(軍人勅令) 암송 등이 강요되어 학교는 군영(軍營)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의 규율도 더욱 엄격해졌다. 1941년 봄 무궁화가 우리나라의 국화라고 말했다가 6회생 박대서(朴台緖)가 퇴학당하였고, 1943년 2월에는 9회생 이정선(李貞善)이 사상이 온건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퇴교당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8회생 갈정호(葛正虎)도 같은 이유로 퇴교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황(戰況)이 점점 불리해지자 1943년 2월 9회생 전원을 대구 일본군(日本軍) 80연대(聯隊)로 끌고 가 가미카제특공대(神風特攻隊)를 양성하는 항공병학교(航空兵學校) 입학을 위한 신체검사와 적성검사를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3월 김형규(金亨奎)와 김재규(金載奎)가 소년 항공병으로 입대하게 되자, 송별회 자리에서 학생들은 「봉선화」와 「나그네 설움」 등 우리 노래를 합창하였다. 이에 학교 당국은 20여 명을 무더기로 2개월간 정학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3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학하던 이정선이 귀국하여 9회생 동기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4월 이정선 등 9회생들이 면학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명성회(明星會)를 조직하자, 10회 동기생 김원현(金元顯) 등과 함께 이에 가담하였다. 회원 중 이정선·권태염(權泰琰)·김홍구·김한룡(金漢龍)·고영찬(高永讚)·박동렬(朴東烈)·최남식 등이 9회생이었다. 이어서 경주중학생 정현모(鄭賢模)와 신두수(申杜洙)가 가입하였다. 한편, 안동농림학교 학생인 권영동(權寧東)·고제하(高濟夏) 등은 전쟁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고 있어 일제의 패전이 확실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들은 학병으로 끌려가 죽기보다는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하였다. 1944년 10월 말 권영동(權寧東)·윤동일(尹東一)·황병기(黃炳基)·이준택(李俊澤)·이갑룡(李甲龍)·장인덕(張寅德)·김우현(金佑炫)·이승태(李承台) 등 9회생이 참여하여 조선회복연구단(朝鮮恢復硏究團)을 조직하였다. 기본 목적은 “주권을 탈환하고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는 데 두었으나,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여 조직의 확대 강화를 기하며 때가 되면 일거에 공공기관을 파괴하는 것을 실천 목표”로 삼았다. 거사를 위한 사전 지식과 연구가 필요하여 연구단으로 그 이름을 정하고, 부서 및 부서 책임자를 정했으며, 백태성의원(후에 성소병원) 원장 백태성(白泰星) 등이 지원하고, 교유(敎諭) 유시승(柳時昇)도 가담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44년 방학 때까지 단원은 50여 명에 이르렀고, 거사 계획도 구체화되었다.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에 있는 총으로 안동경찰서와 안동 헌병파견대를 기습 공격·점령하여 일본인들을 제압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義城)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4년 11월 조선회복연구단과 명성회가 좀 더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합류하자, 명성회 회원이었던 그도 조선회복연구단 단원이 되었다. 1944년 12월 20일 8회생의 졸업식 날을 1차 거사일로 계획하였으나 무산되었다. 그 후 1945년 9회생이 졸업하는 3월 이전인 2월 27일을 2차 거사일로 잡았다가 다시 3월 10일로 연기하였다. 연기한 이유는 그 날은 일본군이 러일전쟁 때에 중국 선양(瀋陽)을 점령한 일본 육군기념일(陸軍記念日)로 각종 행사가 예정되어 있어 경비가 허술하리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조선회복연구단은 거사 계획을 앞두고 초조와 긴박감으로 대기하고 있던 중, 1945년 2월 초 일제 경찰에 의해 단원들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먼저 1943년 사상이 ‘불온’하다고 퇴학당한 갈정호가 황해도 겸이포제철소(兼二浦製鐵所)에 근무하다가 붙잡혔다. 이어 2월 7일 9회생 이준택이 수업 도중 겸이포경찰서 형사에 의해 연행되었고, 이승태가 월곡면(月谷面) 자택에서 황해도 경찰부에 구속되었다. 1945년 4월까지 계속된 검거 선풍 속에서 단원 70여 명과 함께 붙잡혀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악독한 고문으로 빈사상태가 된 채 6월 5일 풀려났으나, 6월 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