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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왈보

徐曰甫

1887 ~ 1926.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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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서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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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중국방면

지도 위치

광역 지역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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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청년단(베이징)
  • · 의열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평안도 출신으로 1887년생이다. 3세 때 부모가 사망하여 이웃 서석철(徐錫哲)의 양자로 들어가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자랐다고 한다. 본래 성은 유(劉)씨라고 하며, 이명으로 서국일(徐國一)을 사용하였다. 원산에서 일본인이 교육하던 원흥학교(源興學校)를 졸업하고,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공부하였다. 대성학교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민족학교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신민회 인사들을 따라 러시아 지역으로 망명하였다가,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학교를 다녔다. 1910년대 활동은 사망 후 신문기사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부정확하다. 대체로 유동열(柳東說)과 함께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국내 또는 몽고에서 자금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1916년에서 1917년 사이에 한흥교(韓興敎)의 도움으로 베이징에서 육영학교(育英學校)를 다녔다고 한다. 1910년대 말 바오딩보(保定堡) 소재 육군군관학교에서 수학하여 중국군 장교로 재직하였다고도 전해진다.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6월 경 베이징·톈진(天津)지역의 한인 유학생 100여 명을 망라하여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하였다. 단장에 신채호(申采浩), 부단장·총무·통신사장(通信司長)에 한진산(韓震山, 한흥교)이었고, 이때 군무부장을 맡았는데, 중국 군사학교를 졸업한 이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21년 4월 박용만(朴容萬) 등이 중심이 되어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반대와 불승인을 표방하며 제2회 보합단(普合團)을 조직하였는데, 단장에 박용만, 군임장(軍任長)에 노백린, 재임장(財任長)에 김창숙, 내임장(內任長)에 신채호가 선출되었고, 이때 비서를 맡았다. 같은 시기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가 출범하였는데, 군사통일회의는 임시정부의 외교정책에 비판적인 베이징의 인사들이 발기한 것이다. 이듬해에 군사통일회의에 합류하여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2년 중엽 베이징의 남위안항공학교(南苑航空學校)에 입학하여 그 해 11월, 3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우페이후 군벌(吳佩孚軍閥)의 직예육군항공대(直隸陸軍航空隊) 정비행원과 북경육군항공학교 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직예계(直隸系) 군벌과 봉천계(奉天系) 군벌의 직봉전쟁(直奉戰爭)에도 참전하였다. 한편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존폐 문제를 둘러싸고 의열단(義烈團)이 내분에 휩싸지자 최용덕(崔用德)·송호(宋虎)·이한용(李漢龍)·김사집(金思潗) 등과 신의단(信義團)을 조직하여 의열단에서 분리하여 베이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4년 봄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친목·교육·구제 등을 목적으로 결성된 베이징한교구락부(北京韓僑俱樂部)의 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위원들의 임무는 민족운동을 방해하는 부정행위자, 친일 인사, 밀정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5월 선전위원에 선출되어 활동자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였고, 선전기관지 『학살(虐殺)』『도보(導報, 앞잡이)』를을 간행하여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에 배포하였다. 또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창조파 인물들이 베이징으로 와서 한교구락부를 한교자치회(韓僑自治會)로 개칭하는 한편, 이를 정비하여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의 조직을 시도하였다. 당시 남원항공학교 교관으로 재직 중이던 상황에서 함께 참여하여, 1924년 8월 6일 총회에서 신숙(申肅)·원세훈(元世勳)·한진산·조남승(趙南昇)과 함께 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1925년 5·30운동이 일어나자 6월 베이징에서 조남승·한흥(韓興) 등과 ‘한·중 연대 공동항일’을 주장하는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31일 열린 민족주의계열의 한인 학생들이 결성한 조선유학생회에서 개최한 모임에서 원세훈·김창숙·배천택과 함께 새해를 맞는 감상을 나누었다. 이외에도 1925년대 북경에서 일제 밀정 제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의열단체인 다물단(多勿團)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베이징정변을 일으킨 펑위상(馮玉祥)은 자신의 군대를 ‘국민군(國民軍)’으로 개편하였고, 1926년 국민정부(國民政府)에 합류하였다. 펑위상군대에 가담하여, 서북변방독판서(西北邊防督辦署) 참정공병대좌(參政工兵大佐) 겸 서북항공대 교육주임·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중국 혁명전쟁에 적극 참여한 것은 중국 혁명의 성공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뒤에 중국 공군에서 크게 활동한 최용덕(崔用德)의 바오딩항공학교 입학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1926년 5월 6일 장쟈커우(張家口) 콩쟈좡(孔家庄) 비행장에서 새로 들여 온 비행기를 시험 비행하다가 추락 사고로 사망하였다. 사망했을 당시 국내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추모 기사를 실었고, 원산·평양·용정 등지에서는 추모 집회가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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