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世永
世永1870. 5. 29 ~ 1941. 5.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전기∙중기 홍주의병
- · 성명학교
- · 대한협회 은산지회
- · 민단조합
- · 신흥무관학교
- · 대한통군부
- · 대한통의부
- · 한족동맹회
- · 조선혁명당
- · 신사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을미사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70년 5월 29일 충청남도 아산(牙山)에서 아버지 민하(敏夏)와 어머니 평강 채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좌현(佐顯), 호는 고광(古狂), 이명은 천민(天民)·유흠(維欽)이다. 7세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성품이 탁월하고 강개하며 총명하였다. 10세에 부친을 따라 상경한 후, 13세에 종숙부 이민철(李敏哲)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어 참판 김재은(金在殷)의 딸과 결혼하였다. 홍재창(洪在昌)과 양헌수(梁憲洙)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889년 관립 영어학원인 육영공원(育英公)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892년 생부의 상을 당한 후, 1894년 정산((定山), 현 청양군(赤谷面 冠峴里)으로 이주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홍주에서 이설(李偰) 등과 함께 관찰사(觀察使) 이승우(李勝宇)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공주부(公州府) 공략전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하였으나 패배하여 부대가 해산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 육군에 복무하여 그 해 참위(參尉), 1899년 부위(副尉), 1902년 정위(正尉)를 지냈다. 1904년 군대를 떠나 낙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1906년 홍주 의병부대의 참모장이 되어 의병들을 규합하여 군제를 바로 잡고 훈련을 담당하였다. 공주를 향하여 진군하였으나 청양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였다. 1906년 4월 홍산(鴻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서천(舒川)·비인(庇仁)·남포성(藍浦城) 전투에서 연승하고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배하였으며 이 때 붙잡혀 서울 경무청(警務廳)으로 압송되었다. 신문 과정에서 “나는 기어이 원수인 오랑캐를 성토하여, 한번 큰 의리를 만국천하에 알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화를 거두지 않고 일이 성실하게 진행되지 않아 이렇게 잡힌 몸이 되었으니 나에게는 오직 죽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다.”라고 꾸짖었다. 그 해 11월 23일 종신 유형을 받고, 황해도 황주(黃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907년 다시 예비 검속을 받아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 1908년 봄 유배에서 풀려나 청양군 적곡면 관현리로 돌아와 교육사업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기로 결심하고, 그 해 4월 1일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과 함께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세웠다. 교장에 취임하여 홍주의병에 같이 참여했던 이상린(李相麟)·창영(昌永) 등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1909년 부여군 은산면(恩山面)에 대한협회(大韓協會) 부여군 지회를 설립하여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국내에서는 항일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외로 망명을 결심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민단조합(民團組合)에서 활동하였다. 민단조합은 기존 의병운동 계열의 인물이 중심이 되어 국내에 격문을 배포하여 동지 규합과 독립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대한제국 군대 장교 출신으로서 경험을 살려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8월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 조직에 참여하여 군사부장(軍事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10월 대한통군부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되자 군사위원장(軍事委員長)과 참모부장(參謀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베이징(北京)에서 조성환(曺成煥)·손일민(孫逸民) 등과 함께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 해 7월에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제1지부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6월 조성환·김원봉(金元鳳)·김규식(金奎植)·고활신(高豁信) 등과 함께 중국의 항일민족지도자 장쉐량(張學良) 및 중국 국민정부(國民政府) 요인들과 연락하고 중국인 항일결사조직인 북경항일구국회(北京抗日救國會)와 제휴하여 중한항일의용군(中韓抗日義勇軍)을 조직하였다. 여기서 의용군 간부에 충당할 인물 10여 명을 난징(南京)에 있는 남경무관학교(南京武官學校)에 입학시켰으며, 일제 기관의 정보 수집과 일제 요인에 대한 암살 등을 기획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의 관동군사령관(關東軍司令官) 겸 만주전권대사(滿洲全權大使)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 대장을 처단하기 위하여 이창용(李昌用) 등을 창춘(長春)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933년 충칭(重慶)에서 신사회(新社會)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요길흑민중후원회(遼吉黑民衆後援會)를 조직하여 간사(幹事)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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