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준
徐元俊1908. 5. 25 ~ 1935. 4.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평양노동청년회
- · 평양노동연맹
- · 조선혁명당
- · 조선혁명군
- · 국민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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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1908년 (음)5월 25일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양정면(楊井面) 입석리(立石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서복손(徐福孫)이다. 이명으로 김정일(金正一)을 사용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버지 서정벽(徐正璧), 어머니 채씨(蔡氏), 동생 서정준(徐亨俊)이 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평남 대동군(大同郡) 남곶면(南串面) 한문서당에서 3년간 한문과 한글을 배웠다. 평양으로 이거한 뒤에는 야학을 다녔다. 1927~1928년 20개월간 옥고를 치르던 시기 일본어를 익혔다. 소년 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목공(木工)으로 일하였다. 1921년 평양부(平壤府) 죽전리(竹典里)에서 포목상 점원으로, 1923년에는 평양부 창전리(倉田里)에서 김승기지물점(金承基紙物店), 윤세식상점(尹世植商店) 등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다. 1923년 12월 30일 평양양말직공조합사무소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평양점원상조회(平壤店員相助會)가 조직되자 평양점원상조회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8일 개최된 평양점원상조회 제1회 정기총회에 안상묵(安相黙)·이덕산(李德山)·김경수(金景洙)·김용국(金龍國)·노원화(盧元和)·장병삼(張炳三)·김봉운(金鳳雲)·한일선(韓日善)·김돈학(金敦擧)과 함께 참가하였다. 1926년 9월 박철(朴哲)·김종성(金鍾聲)·김가진(金嘉鎭)과 함께 평양노동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시기 평양청년동맹 집행위원, 신간회(新幹會) 지부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평양노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중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혔다. 1928년 1월 14일 평양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고, 검사가 징역 10월을 구형하였다. 1월 2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징역 8월을 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9월 23일 풀려났다. 풀려난 후에는 포목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929년 6월 16일 평양노동연맹 제6회 정기총회속회(定期總會續會)에서 정이범(鄭利範)·최길환(崔吉煥)·한형도(韓亨道)·천훈민(千勳民)·김정덕(金正德)·박병철(博炳哲)·전규성(田奎星)·명덕상(明德相) 등 10명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2월 김도원(金道元)의 소개로 다물단(多勿團)에서 활동했던 김관우(金官宇)를 알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25일 김관우와 함께 평양을 출발하여 신의주(新義州)를 거쳐 펑티엔성(奉天省) 신빈현(新賓縣) 왕칭먼(旺淸門)으로 이동하였다. 그 해 9~10월 사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부사령(副司令) 양세봉(梁世奉)의 권유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참가하였다. 이후 국민부(國民府) 지방정세조사위원(地方情勢調査委員), 조선혁명군 피복공장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1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고이허(高而虛)와 양세봉으로부터 한반도 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연락 기구를 설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권총으로 무장하고 왕칭먼을 출발하여 안둥현(安東縣) 류다오커우(六道溝) 조선혁명당 연락원 김병모(金炳模)의 집으로 이동하였다. 김병모의 소개로 동아일보 지국장 한신옥(韓信玉)을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한 정보를 들었다. 1933년 1월 초 한신옥과 함께 압록강철교를 건너 평북 용천군(龍川郡) 외상면(外上面) 정거동(停車洞) 그의 집으로 이동하였다. 한신옥의 집에 머물면서 일주일 간 인근지역의 금융상황을 조사하였다. 1월 15일 정거동 장승복(張承福)의 집에서 일본인포목상 점원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획득하였고, 이후 안동현 김병모의 집으로 이동하여 획득한 자금을 조선혁명당으로 보냈다. 1933년 2월 14일 안동현을 출발하여 압록강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향하였다. 2월 24일 평양부 동대원리(東大院里)에 있는 서울노동청년회 간부였던 안영준(安永俊)의 집으로 이동하였다. 그 해 5~6월 사이 안영준과 함께 계획을 세워 조선은행 평양지점, 조선상업은행 평양지점 대동문출장소(大同門出張所) 등에서 독립운동자금을 획득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3년 6월 3일 평양경찰서 경관들을 피하여 안영준의 집을 빠져나와 교전을 벌이며 탈출하였다. 중화군 양정면 종숙(從叔) 서정익(徐正益)을 찾아가 탈출에 필요한 자금을 얻었다. 6월 10일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서종면(西鍾面) 온한리(溫寒里)에서 사리원경찰서 경찰에게 검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부장을 처단하였다. 6월 11일 중화군 당정면(唐井面) 당촌리(唐村里)에서 당정면경찰주재소 경찰들과 교전을 벌였다. 다시 만주로 이동하기로 한 하루 전인 1933년 6월 16일 평남 안주군(安州郡) 대이면(大尼面) 백학리(白鶴里)에서 만성경찰주재소 경찰들과 교전을 벌였다. 교전 후 안주경찰서와 평양경찰서에서 무장경관대가 파견되었다. 당일 오후 11시 10분 평원군(平原郡) 동송면(東松面) 청룡리(靑龍里) 박재엽(朴載燁)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평원경찰서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1933년 6월 17일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가 시작되었다. 6월 28일 평양경찰서에서는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총포화약류취체규칙 위반, 살인 등으로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7월 8일 평양지방법원검사국에서는 조사를 마치고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하였다. 1934년 6월 30일 예심이 종결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1934년 10월 2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제1회 공판이 열렸고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였다. 10월 9일 제1심 선고 공판에서 사형을 받았다. 11월 2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 공판이 열렸으나, 역시 사형이 구형되었다. 11월 27일 복심 선고 공판에서 사형을 받고, 12월 1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35년 2월 7일 열린 상고 공판에서 사형이 구형되었다. 2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같은 해 4월 30일 오전 10시 30분 평양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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