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綺漢
綺漢1868. 12. 23 ~ 1941. 10.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공주군 정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68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정안면(正安面) 석송리(石松里)에서 태어났다. 지역에서 유림으로 활동하며, 1919년 4월 1일 정안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공주 지역에서는 3월 7일과 10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진행되지 못하였고, 3월 12일 처음 거행되었다. 이어서 3월 14일 유구, 3월 15일과 17일 공주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4월 1일부터 5일까지 군내 각지에서 활발하게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정안 석송리에서 평소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던 인사로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다수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고 이병억(李秉億)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석송리 마을 주민을 모아 놓고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호소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큰 소리로 “모두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면서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나서 면소재지인 광정리(廣亭里)로 향하였다. 이에 이동안(李東案), (東燁)·정재철(鄭在喆)·문백룡(文百龍)·김정쇠(金正釗)·최병한(崔炳翰) 등 20~30명의 주민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뒤따랐다. 뒤이어 조정관(趙正觀)도 태극기를 들고 광정리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내송리에 이르렀을 때 12시경 식수(植樹) 부역을 마치고 귀가하던 운궁리 주민 20명을 만나자,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였다. 최범성(崔範聲)·윤원식(尹元植)·이월성(李月星)·원강희(元江熙)·김오룡(金五龍)·이명보(李明甫)·이희도(李熙道)·이돈석(李敦錫)·유길도(兪吉道) 등이 참여하였고, 작업 도구인 쇠스랑·곡괭이·삽·지게 등을 가지고 광정리로 향하였다. 광정리에 도착할 즈음 500여 명 불어난 시위 군중은 광정리 도로에서 오른쪽 시장 거리로 가서 일본인 거주지와 일본인 소유 정미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광정리 도로 왼편에 있는 광정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여, 3~4명이 작업 도구로 주재소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머뭇거리는 군중에게 “왜 구경만 하느냐? 빨리 부수라”고 독려하면서, 솔선하여 태극기 깃대로 주재소 문등(門燈)을 깨트렸다. 그러자 윤원석·이월성·김오룡·이돈석·김삼룡(金三龍)·홍점산(洪點山)·황타관(黃他官) 등이 주재소 건물·게시판·유리창·창틀·담장 등 각종 시설물을 파괴하였다. 주재소를 파괴한 후 일부 군중은 광정리에서 석송리로 귀가하여 주막을 하는 김원일(金元日)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오후 3시경 광정리의 주재소가 파괴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공주경찰서에서는 자동차로 순사 2명과 순사보 1명, 헌병 군조와 병졸 5명을 출동시켰다. 오후 4시 40분경 일제 군경은 석송리 주막에 이르렀다. 일제 군경이 탄 자동차를 보자, 휴식을 취하고 있던 14명~15명의 사람들이 도로로 뛰쳐나와 자동차의 진행을 막고 손을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소리를 들은 주민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40~50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자동차에 접근하였다. 그러자 목원(木原) 순사가 하차하고 주도자인 이동안을 주목하고 왼손을 결박하고 오른손마저 잡으며 붙잡으려 하였다. 이때 문백룡·정재철·서순석(徐順石)·노규현(盧奎鉉)·정화순(鄭化順) 등이 “그가 무슨 죄가 있어 잡아 가려는”라고 따지며 순사를 사방에서 떠밀었다. 서순석은 순사의 팔을 잡고 이동안을 끌어 냈고, 김정쇠와 문백룡은 순사 어깨를 밀쳐 포박을 제지하여 이동안이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군경들은 대오(隊伍)에서 이탈되어 각기 수명의 군중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이후 서광순(徐匡淳)과 정재철을 체포하려는 일제 군경을 사람들이 제지하였고, 김정쇠와 전정길(全鼎吉)은 목원 순사에게 덤벼들었으며, 문백룡과 장기현 등은 순사들을 물어뜯었다. 이동안은 이근남 순사보에게 “너도 한국사람인데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며 주먹으로 구타하였다. 중성(中聖) 헌병군조는 군중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칼을 땅에 떨어뜨렸고, 상황이 긴박해지자 발포하였다. 그러자 다른 군경들도 총을 난사하였고, 그 결과 현장에서 이상림(李相霖)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횡산(橫山) 순사는 이동안과 정재철 등을 체포하고 공주로 압송하기 위해 철수하였다. 이어 붙잡히지 않은 인사들을 다시 모아 수백 명을 이끌고 다시 주재소로 가서 밤까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횃불독립만세운동은 4월 3일까지 광정리를 중심으로 부근 산과 들판에서 전개되었고, 이를 제지하려는 일제 군경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는 등 무력적 제압을 자행하였다. 이후 공주경찰서와 정안주재소 경찰들은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탐문 조사를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감행하여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구금된 인사들은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등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9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24명과 함께 항소하였다.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무집행 방해는 무죄가 되었지만, 다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중 1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면서 재차 상고하였으나, 12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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