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起松
起松1888. 11. 7 ~ 1939. 6.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임실군 둔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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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88년 11월 7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신기리(新基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이명은 이기동(李起同)이다. 1919년 3월 23일 전북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獒樹里)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전 10시 임실군 오수면의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교장과 교사들의 방해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이에 지역 유지로서 오병용(吳秉鎔)·이만의(李萬儀)를 비롯하여 천도교·기독교인들과 연락하여 오수리시장 장날인 3월 23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3일 오후 2시 오수리시장에 모인 군중을 향해 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가 800명에 이르자, 주도자라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의해 즉시 붙잡혔다. 이에 성난 시위대가 주재소를 향해 가두 행진을 벌이며 석방을 요구하였다. 당황한 주재소 순사 무라이(村井)는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풀려난 이후 만세시위를 다시 주도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시위대도 2,000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일본인 점포 등을 부수고 면사무소를 향해 시위 행진을 계속하였으며, 면장에게 만세시위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위대는 여세를 몰아 주재소를 접수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이만의를 석방시켰다.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제 경찰은 모두 달아났으나, 한인 순사보 고택기(高宅基)는 저항하다 붙잡혔다. 만세시위가 더욱 격렬해지자, 일제는 남원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 무장 병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둔남면의 이윤의(李倫儀)·이주의(李注儀)·이회열(李會烈)·오병용·이병렬(李秉烈)·이용의(李容儀)·이만의·이기우(李起嵎)·김용식(金容湜)·하용봉(河容鳳), 삼계면의 허섭(許燮), 전남 영광군 법성면의 양태환(梁太煥)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7년을 받자 항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조선은 옛부터 예의를 존중하여 왔다. 한일병합이 있은 후 조선인으로서는 누구나 독립에 뜻을 두고 있다. 조선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범죄냐? 무엇 때문에 창검과 총포를 가지고 수백 명 동포를 잡아 죽이는 것이냐? 조선 민족에 대하여 강포한 행동을 하는 것이냐? (중략) 우리 2천만 동포를 감옥에서 고생시키는 것은 우리 동포의 결심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것인 줄을 모르느냐? 이 내 몸이 죽으면 우리 자손이 있다. 자손의 독립정신은 날로 진보할 것이니 천만년이 가더라도 없이 하지 못할 것이다”고 항변하며 상고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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