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춘
吳敬春1891. 2. 26 ~ 1936. 8. 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홍성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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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0) 1891년 2월 26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오수남(吳壽南)이다. 1919년 4월 7일 장곡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홍성 지역에서는 3월에 만세운동이 몇 차례 일어났으며, 4월 들어서는 군내 각지에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장곡면에서는 4월 4일 윤형중(尹衡重)·윤익중(尹益重)·윤낙중(尹樂重) 3형제의 주도하에 윤의석(尹宜錫)·윤만수(尹萬洙)·이문재(李文載) 등이 화계리·광성리(廣城里)·신풍리(新豐里) 등지의 주민 500여 명과 합세하여 일으킨 횃불만세운동이 있었다. 이어 4월 7일 장곡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때, 종(鍾)을 치면서 마을 주민을 집합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먼저, 집합한 주민들을 화계리 앞산으로 이끌고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인접한 광성리·신풍리 주민들이 시위대에 합세하였다. 300여 명의 시위대는 화계리에서 도산리(道山里)로 이동하여 면사무소 뒤편 응봉산(鷹峰山)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윤형중이 군중들에게 “면사무소는 면을 대표하여 사무를 집행 처리하는 곳으로 면소재지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을 지당하며 또 면 관리도 같은 한국인이므로 공동으로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외치자, 시위대는 호응하여 산 아래 있는 면사무소로 내려왔다. 선두에 있던 김동하(金東河, 東化)가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직원이 보이지 않자 격분하여 “역인(役人, 면직원)이 없을 수 없다”고 말하고, “면사무소는 역할이 없다”며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숙직하던 면서기 임원규(林元圭)를 본 윤형중이 “독립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자, 임원규는 만세 군중들의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껴 도주하고 말았다. 그러자 김동하·이화춘(李化春)·윤상운(尹相雲) 등이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시위 참여자들이 돌과 몽둥이로 면사무소을 공격해 파괴하였다. 김동완(金東完)·김용숙(金用肅)·김용제(金用濟)·김차제(金次濟)·한상철(韓相鐵) 등이 유리창 창문 17장을 깨뜨렸고, 이문재·강태삼(姜泰三) 등은 문기둥을 넘어뜨렸으며, 김정랑(金正浪)·이소만(李小萬)은 굴뚝(煙突) 1개를 파손시켰다. 이어 강태삼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금고를 파괴하였고, 군중도 사무실 기물과 문서들을 파손하였다. 다음날인 4월 8일에도 밤 11시 도산리에서 지역 주민과 학생 60여 명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홍성에서 일제 말단 행정 기관인 면사무소를 공격한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 이른바 「범죄인명부」에 기록된 36명 가운데 24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5명이 90대의 태형을 당하고, 18명은 징역 6월에서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또한 1명은 벌금 30엔을 받았다. 12명은 홍성경찰서에서 4월 18일과 23일 양일에 걸쳐 60~90도의 태형을 당하였다. 이 일로 1919년 4월 24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 홍성경찰서를 거쳐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같은 해 5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그 해 8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무죄를 주장하며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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