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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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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읍(奉化邑) 거촌리(巨村里) 출신이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당시 한국군 하사(下士)였다고 한다. 또한 일제의 정보 기록에 따르면 안동군(安東郡)·봉산군(鳳山郡)의 승려로서 참봉 또는 주사를 지냈고, 한 때는 일진회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907년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들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격문을 돌리고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병력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영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부장(副將) 홍병팔(洪秉八)과 부장(部將) 박원도(朴元道 )등을 지휘하여 의병 300~500명을 이끌고 순흥(順興, 현 영주)·영월(寧越)·울진(蔚珍)·삼척(三陟)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8월 하순에는 경북 풍기(豊基)·영주(榮州)·순흥·봉화(奉化)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7년 (음)7월 23일에는 관동창의대를 일으킨 대장 성익현(成益鉉)의 지휘 아래 도총장(都總將) 정경태(鄭敬泰), 부장 이상렬(李相烈)과 함께 도총독(都總督)이 되어 강원도 울진·삼척·평해(平海, 현 울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18일 성익현·정경태·최종환(崔鍾桓)·정성진(鄭聲振) 등과 함께 의병 500명을 거느리고 울진읍내 경무분견소(警務分遣所)를 습격하여 8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분견소 소속 경부 이하 순검 등 10여 명을 격퇴시키고 물품 등을 모집하였다. 이때 민가 36채도 불태웠다. 같은 해 11월 10일에는 의병 약 400명을 이끌고 삼척에서 봉화읍을 공격하여 봉화분파소 보조원 4명과 분견대 수비병 5명을 격퇴시키고 건물 등을 불태웠다. 11월 26일에는 삼척군 반생야(般生野)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8년 3월 22일 봉화군 소천면(小川面) 석개리(石開里)에서 부장 홍병팔이 일본군에게 붙잡혔지만, 부장 박원도와 함께 봉화·영월·성양(性陽)·울진 등지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강원도 인제(麟蹄) 부근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큰 어려움을 당한 이강년(李康秊) 부대가 경북 봉화 지역으로 넘어오자 이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익현·김상태·정경태·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蓮哲) 등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이에 호응하였다. 이 때 이강년 부대와 연합하고 우군장(右軍將)으로 활동하였다. 토벌대에 대비하여 경계하고 있던 의병들은 1908년 5월 16일 서벽리 방면으로 들어오는 봉화주재소 순사 등 10여 명과 마을 입구에서 새벽부터 약 4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이들을 내성(乃城)으로 격퇴시켰다. 이튿날 새벽 영주수비대를 중심으로 하는 토벌대 약 10명이 다시 서벽리 동쪽으로 들어오자 의병들은 이들을 완전 포위하여 격퇴시켰다. 5월 18일 일제 헌병 경찰이 다시 내성을 습격하여 6시간 동안 교전을 하였다. 여기서 의병 20여 명이 희생되는 피해를 입고, 내성 서북방면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이튿날 안동·영주·함창(咸昌, 현 상주)수비대의 지원을 받은 일본 토벌대의 기습 공격으로 또 다시 큰 피해를 입고 서벽리 방면으로 물러났다. 이후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돌아갔다. 이후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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