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소
尹秉召1887. 10. 12 ~ 1919. 12.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시흥군 수암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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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7년 10월 12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음덕면(陰德面) 안석리(安石里, 현 화성시 남양읍 안석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윤병소(尹秉昭)이다. 1919년 판결문에는 본적지와 거주지가 모두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수암면(秀岩面, 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능곡리(陵谷里)로 기재되어 있어 특정 시점에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이봉구(李鳳求)에게 이튿날 수암리(秀岩里) 비립동(碑立洞, 비석거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니 참가하라는 격문이 화정리(花井里) 일대에 돌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그날 밤 능곡리에도 동일한 격문이 돌았다는 것을 친동생에게 들었다. 이에 3월 30일 오전 10시경, 집합 장소인 수암리 비석거리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참석한 2,0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특히 와리(瓦里)에 살고 있는 홍순칠(洪淳七)은 소작인 30명을 데리고 나왔다. 홍순칠은 소작인들에게 전날 격문의 내용을 알리며,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홍순칠이 인원을 점거하고 있을 때 일본 순사가 와서 해산을 명령하였다. 수암리 구장이 불참하는 등 지도부의 부재로 시위대는 해산 여부를 놓고 우왕좌왕하며 동요하였다. 이때 월파리(月波里) 출신 유익수(柳益秀)와 함께 읍내로 갈 것을 선언하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마침 와리 주민들이 제작한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2,000여 명의 시위대는 각자 준비한 크고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격앙된 군중은 “수암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불 태워버리자”라고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제지하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대와 함께 공립보통학교·경찰주재소·면사무소를 차례로 돌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만세운동이 격렬해지자 일제 경찰은 사격 자세를 취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후 이봉문(李奉文) 등은 수암리 구장을 찾아가 만세시위의 불참에 대해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19년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19년 12월 13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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