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찬규
卞欑圭1906. 12. 8 ~ 1950. 1. 3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낙동농민조합 초계지부
- · 초계농민조합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2)
관련 사건
- · 낙동농민조합 사건
- · 초계농민조합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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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2) 1906년 12월 8일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초계면(草溪面) 관평리(官坪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변찬규(卞粲圭·卞瓚圭)를 썼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청년·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초계청년회(草溪靑年會)에 참가하여 임원 선거에서 서무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 해 2월 합천기자동맹을 발기하여 초대 임원으로 선임되었고, 1931년 경남기자동맹 제6회 정기대회에서 집행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6월 10일 초계 명륜당에서 개최된 초계청년회 제2회 임시총회에서 임시집행부 의장이 되어 회관 건축, 회원 정리와 부서 변경 등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였고, 위원장 겸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2월 합천군 낙동농민조합 초계지부를 설치하여 지부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그해 4월 농민조합 사무실에 항일 포스터를 걸어 두었다는 이유로 붙잡혀 10일 동안 구류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 무렵 농민들의 소작권 박탈에 반대하는 등 지역 내 소작쟁의를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 조합원들과 함께 국사봉(國師峰)에 올라 노동절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정순조(鄭順祚)·최태규(崔泰圭)·김판개(金判介) 등 농민조합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2년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이른바 폭행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33년 1월 23일 풀려났다. 이후 낙동농민조합 초계지부를 해소하고 초계농민조합을 창립하였다. 1933년 2월 16일 조합의 창립과 동시에 거행된 간부 선거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조합을 이끌었다. 같은 해 5월 1일 초계면 관평리 야학교 내에서 노동절 기념식을 개최했는데, 조합원과 노동자 등 100여 명 앞에 서서 농민조합의 방침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때 조선총독의 시정방침에 문제를 제기하여 “땔감의 자유로운 채취, 소작 빈농에 대한 면작(棉作) 장려 반대, 조선인의 자유로운 일본 도항 장려” 등을 제기하였다. 이 일로 변상규(卞相圭)·정순조 등과 함께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3년 6월 5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항소하여 그해 7월 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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