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응선
白膺善1896. 3. 27 ~ 1920. 3.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동미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2)
관련 사건
- · 제주군 신좌면(3.21~23)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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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2) 1896년 3월 27일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아버지는 백찬규(白粲奎)이다. 1919년에는 과자상(菓子商)을 하며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신좌면 조천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천리 일대의 만세운동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서 유학 중이던 김장환(金章煥)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1919년 3월 16일경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귀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제주도 유림 세력의 중심 인물인 김시학(金時學)은 김장환에게 소식을 들은 후, 뜻을 함께 할 14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 동참해 다른 동지들과 조천리 인근 미밋 동산에 모여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김시범(金時範)·김형배(金瀅培) 등과 함께 소형 태극기 300여 장을 제작하였다. 3월 21일 오전 10시 제주도 유림의 거두인 김시우(金時宇)의 소기일(小朞日)을 맞아 동지 14인과 인근 지역의 서당(書堂) 학생 등 150여 명이 신좌면 조천리 미밋 동산에 모였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시작하였고, 주민들이 점차 참여하여 그 수가 5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 행진은 조천 비석거리까지 이어졌으며, 일부는 신촌리(新村里)를 향하여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진압을 시도하였고, 이 가운데에서 13명이 연행되고 3명이 부상하면서 시위는 종료되었다. 다음날인 3월 22일 박두규(朴斗奎)·김필원(金弼遠) 등과 함께 조천 장터에서 200여 명을 모으고, 전날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후 시위대를 이끌고 신촌리를 향해 행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과 다시금 충돌하여 일부는 체포되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3월 23일 오후 1시경부터 김연배(金年培)·이문천(李文千) 등과 함께 시위대를 조직하여, 조천의 5일 장터 자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후 이문천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함덕리(咸德里) 방면으로 행진하였는데, 함덕리에 도착하자 시위대는 800여 명에 달하였다.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 인물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감옥에서 일하여 번 돈으로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고, 이 자금을 독립운동에 사용하도록 기증하였다. 1920년 3월 28일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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