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응봉
白應峯1900. 11. 12 ~ 1982. 2.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9)
관련 사건
- ·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9) 1900년 11월 12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원구리(元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영덕 지역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2일에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3월 18일 영덕읍내, 영해 성내동(城內洞)시장 시위와 병곡면 시위, 19일 창수면(蒼水面) 시위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의 북장리교 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은 3월 초순에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는데 도중에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접하였다. 김세영은 유학을 포기하고 즉시 영덕으로 내려와 3월 12일 평소 친분이 있던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과 낙평동 교회에서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기독교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영덕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다. 김세영은 권태원에게 영해에서 만세시위를 하기 위하여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교회의 조사(助事) 정규하(丁奎河)와 연락을 하도록 하였다. 권태원은 정규하와 만나 3월 18일 장날에 영해의 성내동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면서 지역의 대표적인 인사들과 만나 김세영의 구상을 설명하였다. 3월 18일 정오에 정규하 등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안고 영해면의 성내동 시장으로 진입하였고, 오후 1시에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2000~3000명의 장터 군중이 호응하여 삽시간에 영해 일대는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이때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장 부근을 행진하였다. 성내동 시위는 주변 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날 오후 2시에 정규하의 지휘에 따라 일부 시위대가 병곡면으로 이동하면서 병곡주재소를 거점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3월 19일에 창수면의 시위로도 연결되었다. 영해와 병곡의 시위는 주재소, 면사무소, 학교 등을 파괴하는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해산하였고,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집행방해죄, 건조물 손괴죄, 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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