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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범

朴注範

1885. 8. 25 ~ 1919.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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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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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咸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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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함안군 군북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5년 8월 25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가야면(伽倻面) 산서리(山西里)에서 태어났다. 초명(初名)은 주한(注漢)이며, 자(字)는 선홍(善洪), 호(號)는 동강(東崗)이다. 1919년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郡北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이를 비난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국권 회복을 위한 방도를 모의하였다. 여기에는 매형인 조용대(趙鏞大)의 영향이 컸다. 조용대는 군북면 만세시위의 또 다른 주도자로서, 군북면 사촌리(舍村里)에 위치한 자신의 사랑채를 시위 계획을 의논하는 주요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9일 칠북면(漆北面) 이령리(二靈里) 연개장터 시위를 시작으로 4월 3일 칠원면(漆原面) 시위까지 만세시위는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함안지역의 만세운동 중 가장 격렬했던 것은 3월 20일 군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였다. 이 시위는 전날인 19일 함안읍(咸安邑)내 만세시위와 연결되어 있었다. 함안군 군북면의 만세운동은 3월 5일 고종 국상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 등을 가지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함안 읍내 만세시위의 주도자 중 한 명인 이희석(李喜錫)이 군북 지역 인사들의 참여를 요청하였는데, 그 회합이 매형 조용대의 사랑채에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 모인 군북면 유지들은 함안 읍내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하는 동시에 이와 별도로 군북면에서도 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3월 10일 백이산(伯夷山) 서산서당(西山書堂)에서 논의되었다. 거사 날짜는 20일로 정해졌고, 만세시위에 필요한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서 등사 등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매형 조용대와 함께 가야면 등 함안군 각 지역을 돌며 연락을 담당하였고, 서산서당에서 이루어진 태극기 제작과 신창학교(新昌學校) 등사기를 이용한 독립선언문 인쇄에도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시위는 우선 오전 9시에 신창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또 다른 주도자인 조상규(趙相奎)가 신창학교 학생 5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이 만세시위의 신호탄이었다. 이 오전 시위는 당시 군북면에 들어와 있던 일본군 부대가 출동하면서 해산되었으나, 오후 1시 군북 장터 근처 냇가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 만세시위에는 약 5,000명의 군중이 집결하였다. 한편, 일제 군경이 공포탄을 발사하며 거칠게 진압하자, 시위대의 행동도 보다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군북면사무소와 군북경찰관주재소를 포위하고 투석전을 전개하며 주재소 유리창을 파손하는 등 상황이 격화되었다. 이때 시위 군중이 해산하기는커녕 더욱 거칠게 저항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일제 군경은 조준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매형 조용대와 함께 시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당일 시위 현장에서 일제 군경의 발포로 20명이 사망하였고, 모두 3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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