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태영
成泰永1887. 12. 10 ~ 1968. 10.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경학사
- · 부민단
- · 한족회
- · 한족노동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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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7년 12월 10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대지면(大地面) 효정리(孝亭里)에서 아버지 성일호(成馹鎬)와 어머니 노성녀(盧姓女)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성태영(成兌永·成台永)을 사용하였다. 1914년 남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 경신참변 이후 북만주로 옮겨가 지린 지역에서 한족노동당과 농민사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국 교민들의 생활 안정과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4년 남만주로 건너가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여 한국 교민의 자치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경신참변 이후 지린성(吉林省) 상의가(商儀街)에서 이기팔(李基八)과 함께 정미소 ‘부흥태(復興泰)’를 경영하였다. 부흥태 정미소는 지린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거점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재정적 후원을 담당했던 곳이며,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 3부의 통합에 관한 회의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의 진로와 방향을 논의했던 곳이다. 1924년 11월 4일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창립총회에 참여하였다. 한족노동당은 판스현(磐石縣)에서 김응섭(金應燮)을 중앙의사위원회(中央議事委員會) 위원장으로 하고 경상도 출신의 간부진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편성하였던 독립운동 단체로, 1920년대 중반 판스현 일대에 거주하던 한인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이 단체에서 중앙의사위원(中央議事委員)에 선임되었다. 1927년 4월 김기풍(金基豊)·김지호(金鎭浩)·김원식(金元植)·김이대(金履大)·김호(金虎)·김동삼(金東三) 등 35명과 함께 발기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였다. 농민호조사는 조선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산업 생산의 증가와 교육의 발전 도모, 그리고 위생과 보건을 수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1927년 11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의 한국 교포 구축(驅逐) 계획을 탐지하고 ‘한교구축문제대책강구회(韓僑驅逐問題對策講究會)’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의 간사가 되어 윤화전(尹華田)·손정도(孫貞道)·이동우(李東雨)·고유천(高維天) 등 1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지린성에서 동포임시대회(同胞臨時大會)를 개최하고, 한인 교포의 구축 방지를 위해 지린성 당국에 항의하는 한편 탄원서를 제출하는 데 앞장섰다. 1932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기독교 전도사로서 지린교회(吉林敎會)에서 시무하면서 지린성신학교(吉林省神學校)를 설립하여 교역자(敎役者)를 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33년 11월에는 동아일보 지린지국(吉林支局)의 고문(顧問)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12월에는 지린 일원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규합하여 흥농계(興農稧)를 조직하고 ‘흥농저축(興農貯蓄)을 장려하여 자작농창정(自作農創定)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또 1937년 7월 지린에 있는 조선인 보통학교가 경비 문제로 존폐 위기에 처하자 후원회를 조직하여 그 위원으로 적극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여 신국가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8년 3월 기미독립선언기념대회(己未獨立宣言紀念大會)를 주최하여 오세창(吳世昌)이 회장을 맡았고, 명제세(明濟世)·이윤영(李允榮)·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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