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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엽

白永燁

1892. 5. 25 ~ 197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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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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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야소교진정회
  • · 화동학생회
  • · 우리소년회(펑톈)
  • · 종교교육협회
  • · 조선기독청년면려회 랴오닝연합회
  • · 흥사단
  • · 수양동우회 선천지회
  • · 만주조난동포문제협의회
  • · 고려청년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 모의 사건
  • · 유호임시국민대회
  • · 길돈 사건
  • · 수양동우회 사건
  • · 흥사단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2년 5월 25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성면(古城面) 정주동(正州洞)에서 태어났다. 1937년 활동 당시 주소지는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 천북동(川北洞)이다. 이명은 김영목(金永睦)이며,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백석영엽(白石永燁)을 사용하였다. 1912년 의주의 사립 양실중학교(養實中學校)를 졸업하였다. 재학 시절 백용석(白用錫) 등의 감화와 일제의 강제병합 등으로 인해 민족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의 회문학당(淮文學堂)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재류(在留) 금지 처분을 받고 국내로 돌려보내져, 만 1년 동안 울릉도(鬱陵島)에 강제 거주하였다. 1912년 중국 체류 당시 하얼빈(哈爾賓)에서 일어난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 모의 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것이었다. 풀려난 후 상제교회(上帝敎會)에서 전도사(傳道師)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8월 4일 고성면 대산동(臺山洞)의 주일학교 학예회에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항일 연설을 하였다. 1918년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8월경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중국인 학생들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였으며, 외무부 서기(書記)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9월경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임시정부 대표의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와 고병철(高秉哲)로부터 500원을 받아 임시정부 재무차장 윤현진(尹顯進)에게 전해주었다. 같은 해 11월 상하이 대한인민단(大韓人民團) 사무소에서 열린 유호임시국민대회(留滬臨時國民大會)에 참여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안창호(安昌浩)의 신임을 얻었으며, 흥사단(興士團)에서도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임시정부 신년축하회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6월 조선독립청년단 총재이자 임시정부 법무차장인 안병찬(安秉瓚)이 만주 콴톈현(寬甸縣)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자, 외무총장 안창호와 재무국장 고일청(高一淸)으로부터 외교 교섭의 명을 받고 안병찬의 석방을 협의하였다. 같은 해 8월 황진남(黃鎭南)과 함께 톈진(天津)의 난카이대학(南開大學)에 파견되어 장바이링(張伯笭)과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 외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진링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난징으로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1920년 당시 미국 시찰단이 한국에 오는 것을 계기로 「독립청원서」를 영문과 한글로 작성하였고, 이를 중국 안둥(安東)의 이륭양행(怡隆洋行)에 밀송하여 다시 서울로 보내는 등, 겉으로는 친일(親日)로 가장했으나 이면에서는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3월 3일 상하이에서 손정도(孫貞道)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에 가입하여 조사(助事)로 활동하면서, 국내외의 여러 교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같은 해 4월 4일 진링대학을 졸업하고 난징 호부가(戶部街)의 중국인 예수교회에서 장로교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22년 4월 13일 하얼빈으로 가서 중국15도가(中國十五道街)에 있는 예수교회 내에 거주하면서 목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4일 여운형(呂運亨)·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화동학생회(華東學生會) 대회에 중국지역 대표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8월 14일자로 평남 안주교회(安州敎會) 목사를 명받고 부임하던 중인 16일 신의주행 급행열차 안에서 신의주경찰서 소속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의 여비를 마련해준 일과 1920년 안병찬의 석방을 위한 임시정부의 명령을 수행한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10월 3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풀려난 후 줄곧 국내외에서 목사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국내를 근거로 만주와 중국 등지를 오가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3년 3월 선천군 사립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졸업식에 참석하는 등 평북지역을 중심으로 교육운동 등 각종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9월 중국 펑톈(奉天) 서탑교회(西塔敎會) 목사로 부임하였고, 그해 12월 11일 현지의 한국인 아동을 위해 우리소년회를 창립하고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3월에는 한국인 아동을 위해 서탑유치원을 만들어 직접 운영하였다. 이후 1930년대 초까지 서탑교회 목사로 근무하면서 국내의 의주와 선천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1926년 2월 19일 의주군 비현면(枇峴面)의 체마기독교회(替馬基督敎會)에서 주일학교 발전과 기타 종교 교육을 위해 종교교육협회(宗敎敎育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외에도 국내와 만주 각지의 강연회에 연사로 파견되었다. 1928년 펑톈에서 한국인 예수교회 건축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1930년 2월 1일 남만주의 사평가(四平街)에 있는 기독교 엡윗청년회 주최 대강연회에서 ‘활로의 개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8년 9~10월에는 광둥(廣東) 교외의 한국인이 펑톈에 있는 자신에게 폭탄 수십 개를 보내 국내로 반입하려 했다는 이유로 가택수색을 당하기도 했으나, 허위 정보로 판명되었다. 1930년 8월 1일 북만주에서 일어난 한국인들의 대대적인 반제 반봉건 투쟁인 ‘길돈(吉敦)사건’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대해 같은 해 10월 ‘길돈 사건’ 토의대회를 열고 조난 동포 구제를 위한 위문회를 조직하였다. 그해 12월 초 모집한 위문금 250원을 가지고 대표로 직접 지린(吉林)을 다녀왔으며, 12월 11일 사건 조사보고회 및 피해 동포 추도회를 열었다. 1931년 8월 17~18일 조선기독청년면려회(朝鮮基督靑年勉勵會) 랴오닝연합회(遼寧聯合會) 제2회 정기총회에서 회계로 선임되었다. 같은 날 평양 대동강(大同江)에서 열린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하계대회에서 김성업(金性業)의 권유로 동우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동우회 선천지회(宣川支會) 간사가 되어 민족계몽과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장이욱(張利郁) 등과 함께 직업학교 건설, 보건운동 등에 대해 모색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6일 요양차 선천으로 돌아왔다. 같은 달 31일 만주조난동포문제협의회(滿洲遭難同胞問題協議會)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1월 협의회의 ‘위문사’ 자격으로 다시 펑톈으로 파견되었다. 1932년 무렵 완전히 귀국하였다. 그해 8월 곽산교회(郭山敎會) 목사로 부임한 이래 1937년까지 평북 각지에서 열린 기독교 계통의 강연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거나 각종 구제금이나 교육 관련 성금 모집 등에 앞장섰다. 1933년 9월 5일 선천읍 북교회(北敎會) 목사로 부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펑톈의 조선인기독교회 헌당식(獻堂式)에 참석하였다. 1934년 2월 장로교 평북노회(平北老會 )회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계의 유지로서 평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이다가, 1937년 5월 16일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에 관계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해 11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38년 7월 30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같은 해 11월 3일 효자동 이광수(李光秀)의 처 허영숙(許英肅) 집에서 이광수의 사회로 개최된 ‘동우회 및 흥사단 사건 보석 석방자 일동’의 ‘시국에 대한 사상전향 회의’에 출석하였다. 1939년 3월 오랫동안 문을 닫은 평양의 장로교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기성회의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9년 12월 8일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이에 불복한 검사의 항소로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즉시 상고하였고, 1941년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목사직을 사임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활동하였다. 월남하기 전인 1945년 9월 9일 고려청년당(高麗靑年黨) 창립준비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11월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창당된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에 참여하였다. 1946년 8월 전재(戰災) 학생을 원호하는 사회단체와 학생단체 18개가 모여 결성된 전재학생원호회협의연합체 조직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0월에 전재학생원호단체 서울연합회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같은 달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입법의원 대의원 선거감시원으로 충청북도에 파견되었다. 1946년 당시 한경직(韓景職)을 회장으로 월남한 기독교인 중심으로 조직된 ‘이북기독교신도연합회’에서 1947년 12월 대광중학교 설립을 추진할 때 적극 참여하였다. 1947년 2월 2일 영락교회(永樂敎會)에서 성결교 박현명(朴炫明), 감리교 이윤영(李允榮) 등 30여 명과 함께 ‘기독교 연합 신도대회’를 열기로 발기하였다. 같은 해 3월 25일부로 강원도 인사행정처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유엔의 한국방문단이 월남한 북측 지도자들과 회견하여 38도선 이북의 상황에 대해 협의하는 과정에서, 재남(在南) 평북도민회(平北道民會) 회장이자 중구교회(中區敎會) 목사 자격으로 참여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8년 4월 백인제(白麟濟)의 국회의원 선거 후원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북인대표단 특선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정치분과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1월 20일 대광중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약 22년 동안 평안북도지사직을 수행하였고, 조선민주당 최고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 외에도 보성여학교 재단이사장과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2년 2월 사단법인 민족통일촉진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73년 10월 12일 사망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眞乾面) 영락동산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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