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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영

白信永

1889. 7. 8 ~ 1950.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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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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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密陽)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밀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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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7월 8일 경상남도 밀양(密陽)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16세에 혼인하였으나, 불과 몇 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1907년 서울로 올라와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다시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부산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있던 1919년 2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당수 서병호(徐丙浩)와 그의 부인 김순애(金淳愛)가 국내 정세를 살피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을 때, 이들과 함께 만세운동 계획과 신한청년당의 한국 해외 선전운동의 합류를 모의하고 한국대표 파견 경비 조달 문제를 의논하였다. 같은 해 7월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3·4월 오현주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와 최숙자(崔淑子)·김원경(金元慶) 등이 중심이 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가 같은 해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총무 이병철(李秉徹)의 주선으로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이후 기독교회·학교·병원 등을 이용하여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회원들의 회비와 수예품 판매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음)7월 부산 지역을 통괄하는 부산지부장에 선임되어 회비를 납부하고 조직 확대에 힘썼다. 그런데 오현주(吳玄洲) 등 지도부의 독립 성취에 대한 자신감 상실로 인하여 점차 활동이 침체되어갔다. 이 무렵 3·1운동의 여성계 지도자로 수감되었던 김마리아(金瑪利亞)와 황애시덕(黃愛施德, 이명 : 黃愛德)이 풀려나 부진상태에 빠져있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였다. 즉,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의 출감을 위로·축하하는 다과회 모임을 명분으로 이정숙(李貞淑)·장선희(張善禧)·김영순(金英順)·이혜경(李惠卿) 등과 함께 정신여학교 김마리아의 숙소에 여성계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오랜 회의 끝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혹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본부)의 조직과 임원을 개편하였다. 조직은 결사부(決死部)·적십자부(赤十字部)를 신설하는 등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한 체제로 전환하였다. 임원은 회장에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겸 편집원 황애시덕, 적십자 부장 이정숙·윤진수(尹進遂) 등으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가장 핵심조직인 결사부장을 맡았다. 특히 결사부는 일제에 항거하여 직접적 투쟁이 있을 경우 제1선에 나설 전위부대로 편성되었다. 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부(聯通府)의 역할을 대행하였고, 본부와 지부를 통해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대한총지부(大韓總支部)의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에도 힘써 6천 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그러던 중 오현주의 배신으로 조직이 탄로나 1919년 11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자,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수감되어 일제의 악독한 고문으로 생사를 헤매다가 1920년 5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병이 회복되자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1922년 4월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22년부터 6년간 강경교회의 전도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강릉교회를 거쳐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서울의 체부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이후 경성 성서학원의 여자부 사감으로 10년간 봉직하였다. 1934년 9월 성결교단의 전국연합회부인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이 되었고, 이후 해산될 때까지 계속하여 회장직을 맡았다. 이때 여성전문 기관지 「기쁜소식」을 발간하였다. 1938년 8월 친일파 윤치호 등이 주최한 기독교 애국좌담회에 성결교회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서울에서 활동하였는데, 6.25전쟁 발발 이후 피난길에 나서다 결국 1950년 9월 22일 사망하였다. 전쟁 중에 가매장하였던 시신은 1954년 미아리공동묘지에 이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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