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천흠
宋千欽1888. 4. 8 ~ 1951. 11.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유림단
- · 의열단
- · 상화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유림단 독립청원운동
- · 1919년 경상북도 성주군 만세운동
- · 의열단원 김지섭의 이중교폭탄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4월 8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고산동(高山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야성(冶城)이며, 자는 치만(致萬)이고, 호는 용가(勇加) 또는 소석(小石)이다. 아명은 무출(武出)이고, 이명으로 송인건(宋寅建)을 사용하였으며, 세칭 송장군(宋將軍)이라 불렸다. 1894년 나이 7세에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가정이 빈곤하여 그만두고 주경야독하였다.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과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만주로 가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뒤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데 앞장섰으며,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의 니주바시(二重橋) 폭탄의거를 지원하는 등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하여 후원하였으며, 3월 29일 백세각(百世閣)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처로 배포하는 등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1919년 4월 2일, 유림과 기독교계의 인사들이 만세시위를 시작하자 앞장서서 시장 내의 제일 높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당황한 일제 경찰과 헌병분견대의 군인, 대구(大邱)에서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 등이 주도 인물 장석영(張錫英)·송규선(宋圭善)·송준필 등을 체포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시위 군중을 이끌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한편, 이미 체포된 만세시위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제 경찰과 육박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당하게 경찰서 정문으로 가서 일제 경찰을 질책하며 “대한 사람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왜 체포하느냐. 즉시 석방하라.”라고 요구하였다. 나아가 일제 경찰의 제지를 무릎 쓰고 경찰서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휴대하였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경찰서 마당으로 돌입하니 제지하던 일제 경찰들은 공포(空砲)를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옥상에서 이 상황을 보고 분노하여 경찰서 옥상의 기왓장을 투척하였으며, 군중들도 경찰서를 습격하여 서로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다. 궁지에 몰린 일제 경찰들이 실탄을 발사하자 시위 군중들은 일단 후퇴하였다. 일제 군경의 표적이 되었으므로 후인후부(後咽喉部)와 여러 곳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퇴하는 시위 군중의 대열을 경찰서 뒤편으로 모아 다시 경찰서로 들어가 유치장을 파괴하고 구속되어 있는 인사들을 구출하자고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성주읍 장날 만세시위에서 사망자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상처 치료를 조건으로 배성찬(裵聖贊) 등 여러 명의 신원보증을 받아 가석방되어 일제 경찰 및 헌병 각 1명의 감시를 받으며 대구 자혜병원(慈惠病院)으로 실려 갔다. 병원 의사가 일본인이었으므로 적의 손에 치료받을 수 없다고 호통을 치며 의료 기구를 파괴하고 즉시 퇴원하였다. 1주일간의 가료 기간을 연장하여 향리로 돌아와 일제 경찰의 감시 아래 치료를 받게 되었다. 4월 17일 강제 연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튿날 출두하기로 약속한 뒤, 그날 밤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자신이 구속되면 사건이 확대될 것이라는 옥중 동지들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 재판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1920년 고향에서 은신하고 있을 때 만주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과 연락하여 독립군에 참가하기로 결심하였다. 만세시위운동에 함께 참가했던 동향인 이병철(李柄喆)의 도움으로 모집한 군자금 700원을 휴대하고 신의주(新義州)로 갔다. 배편으로 압록강을 건너려고 계획하였으나 신의주경찰서에 붙잡혀 휴대했던 군자금은 압수당하고 3일간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서울로 압송당하던 중 신의주역에서 포박을 절단하고 호송하던 일제 경찰 3명을 제압하여 쓰러뜨린 뒤 피신하였다. 1920년 8월 이른바 살인미수와 보안법 위반 등으로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중국으로 가는 것을 단념하고 남하하여 전라북도 무주(茂朱)에서 의열단원 이국필(李國弼)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국필의 주선으로 1920년 12월 일본으로 밀항하여 후쿠오카현(福岡縣) 와카마쓰시(若松市)를 근거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3년 비밀결사 상화회(相和會)를 결성하여 규슈(九州) 지방 각 처에 지부를 두고 활동하였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한국인 대학살사건이 벌어지자 후쿠오카현을 중심으로 한국 교민을 규합하여 연명항의서(連名抗議書)를 일본 요로(要路)에 제출하는 한편, 상화회 각 지부가 수집한 구호품을 한국인 이재민들에게 송부하였다. 1924년 1월 5일 도쿄(東京) 황궁 앞 니주바시 폭탄의거를 벌인 의열단원 김지섭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김지섭이 상하이(上海)에서 야와타항(八幡港)에 들어오자 그의 거처를 마련하고 폭탄을 은닉하였으며, 도쿄로 가는 것을 도왔다. 1924년 3월 규슈에서 한인노임체급쟁의(韓人勞賃滯給爭議)의 대표로 선출되어 담판을 벌이다가 충돌하여 일본인 수십 명과 격투를 벌였다. 또 1925년에는 기후현(岐阜縣) 철도공사장에 취업하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의 차별 대우에 분격하여 동포 노동자를 대표하여 항의하다가 일본인 20여 명과 충돌하여 왼쪽 눈을 실명하였다.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교토(京都)로 피신하였다. 1928년 11월 즉위식을 거행하는 ‘쇼와(昭和)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의열단원 이국필 등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던 중 예비검속을 당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에도 1942년까지 수차의 예비검속을 당하였다. 1945년 58세에 왼쪽 눈은 실명하고 입은 찢어지는 등 병든 노구를 이끌고 귀향하였다. 1951년 11월 6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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