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태
卞相泰1889. 10. 11 ~ 1963. 11.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붕회
- · 조선국권회복단
- · 대한독립청년단
- · 고려구국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운동
- · 창원군 삼진 지역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10월 11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현 창원시) 진전면(鎭田面) 일암리(日岩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호는 석당(石塘)이다. 이명으로 변경재(卞敬宰)·변교재(卞敎宰)를 사용하였다.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6명의 동지와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해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대붕회(大鵬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결성에 참여하였고, 1916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변상섭(卞相攝)·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과 함께 창원 지역에서 1919년 3월 28일의 고현(古縣) 장터 만세시위, 4월 3일 전개된 진전면·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의 3개 면 연합의 삼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하순, 서울에 있는 대한독립청년단의 동지들로부터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고,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던 김관제(金觀濟)·이시영(李始榮)과 상경하여 3월 1일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지들과 만세시위를 국내외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이시영은 망명 동지들과의 연락 사명을 띠고 만주로 가고, 김관제는 동부 경남 지역을 담당하고, 서부 경남 지역에 대한 만세 시위의 확산을 담당하여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본가로 돌아와 곧바로 이수룡(李秀龍)·권태용·권영조(權寧祚)·권영대·변상섭·변상헌(卞相憲), 함안(咸安) 지역의 이희석(李喜錫)·조태식(趙台植)·이경형(李景蘅), 고성(固城)의 황태익(黃泰益) 등 동지들을 모았다. 이들에서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운동의 상황을 상세히 전달하고, 동지들과 함께 경남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곧이어 같은 창원 지역의 동지들인 권태용·권영조·권영대·변상섭·변상헌·백승학(白承鶴) 등을 다시 소집하여 창원에서의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논의 결과, 인근에서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진전면 오서리(五西里)의 고현장터 장날인 3월 28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이에 그 준비에 착수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할 선전 격문과 태극기 등을 제작하고, 독립선언서 1,000매를 등사하였다. 만세운동의 거사일인 3월 28일 동지들과 함께 고현장터로 나가, 권영대가 장터 중앙에 만들어 놓은 임시 단상으로 올라가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시장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동지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주민들에게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한 50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자, 이들을 지휘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연창하면서 일본 헌병주재소가 위치한 진동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일제는 진동헌병주재소의 헌병들과 마산의 일본군 중포병대대를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폭력을 사용하여 강제 진압하였다. 이 결과 오후 5시 경, 권영조·백승학 등 11명이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변상섭·변상술·권영대 등의 동지들과 일제 헌병대의 검거망을 피하였다.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일제가 폭력적으로 진압한 것에 크게 분노하여 동지들과 함께 창원의 서부 지역인 삼진 지역(진동면·진북면·진전면)에서 2차 만세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태익(黃泰益)·구수서(具守書)·변우범(卞又範)·변상헌(卞相憲) 등 지역 인사들이 동지로 새롭게 합류하였다. 이들과 논의를 통해 삼진 만세시위 거사일을 4월 3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의 선두에 세울 대형 태극기 6기와 주민들에게 배포할 소형 태극기 수십 개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동지들 서로 간에 인근 주민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지역을 분담하여 마을별 연락을 담당하였다. 4월 3일 오전 동지들과 함께 진전면 양촌리(良村里)의 냇가로 향하였다. 오전 9시 경 냇가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자, 3개 면에서 나온 수천 명의 주민들이 태극기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주민들의 앞으로 나가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 민족이며 자유국(自由國)의 국민이다. 일본의 관여는 추호라도 받으면 안 된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라고 연설하였다. 뒤이어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후, 다시 주민들 앞으로 나가 큰 목소리로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주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큰 목소리로 ‘조선 독립 만세’를 따라 외쳤다. 변상섭 등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선두에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 독립 만세’를 연창하며 진동면의 일본 헌병주재소를 향해 만세 행진을 시작하였다. 행진하는 도중 만세시위에 공감한 많은 주민들이 속속 동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오후 2시 경, 시위대 선두가 진북면 사동리(社洞里)의 다리에 이르렀을 때, 진동의 일본 헌병 및 보조원 8명과 현지 일본 재향군인 30여 명이 시위대를 가로 막고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일본 헌병대·재향군인들과 맞서 투석전과 몸싸움을 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는 총검을 휘두르며 폭력으로 대응하였으나, 만세시위를 진압할 수 없었다. 시위대는 일제 헌병들을 구타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이에 일제는 이번에도 마산의 중포병대대와 일본인 재향군인들을 지원 병력으로 파견하여 비무장의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로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변상복(卞相福)·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김영환(金英煥) 등 8명이 일제 군경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이때에도 일제의 체포를 피해 탈출하여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20년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의 적용 문제와 관련한 공소권의 관할 문제로 여러 차례 재판이 무산되다가,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으로부터 경성지방법원이 관할 재판소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2년 10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동일한게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41년 의열단(義烈團) 단원이었던 구여순(具汝淳)·이주순(李周順)등과 함께 고려구국동맹(高麗救國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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