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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광국

邊廣國

1881 ~ 194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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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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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이원(利原)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이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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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6)

관련 사건

  • · 이원군 남면 차호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6)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하차호리(下遮湖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39세로, 1881년생으로 추정된다. 당시 명태 판매업에 종사하던 중, 이원군 남면 차호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함경남도 이원군 일대에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 소식이 전달된 것은 1919년 3월 5일이었다. 그런데 곡구헌병대가 사전에 이원군의 천도교와 개신교 인사들에게 전달 예정이었던 독립선언서를 압수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원군 사람들은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원군의 만세시위는 이원군 동면에서 시작되었다. 3월 7일 이원군 동면(東面)에 위치한 이원군 천도교구실에서 회합이 열렸다. 그 날 회합을 주도한 이원군 천도교교구장 김병준(金秉濬)은 이도재(李道在)·박승룡(朴承龍)을 비롯한 15인과 함께 개신교 신자 박용해(朴龍海)가 경성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회람하였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토대로 이원군 서면(西面) 남문리(南門里)에 위치한 읍내 시장에서 진행할 만세시위에 배포할 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아울러 장날이 서는 3월 10일에 만세시위를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전 11시 30분 이원군 서면의 이원 읍내에서 천도교도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그 날 만세시위는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 규모는 800여 명에 이르렀다. 3월 11일 오후 1시 무렵 남면 차호시장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김탁(金鐸)을 비롯해서 용항리(龍項里)·하차호리·상차호리(上遮湖里)·포항리(浦項里) 주민들이 이끌었다. 주민들은 ‘조선독립국’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깃발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은 장터에 모인 군중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으며, 이내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시위대의 일원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차호헌병주재소·면사무소·공립보통학교·야소교회당 일대를 행진하였다. 김탁·장병삼(張炳涉)·신종규(辛宗奎)·강응삼(姜應三)·전원숙(全元淑) 등은 시위대의 행진 중간에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연설하면서 시위대의 만세시위를 독려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차호공립보통학교에 모여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독립연설에 참여하였으며, 오후 4시 무렵 해산하였다. 3월 12일에도 박정순(朴正淳)을 비롯해서 학생·천도교도가 중심이 된 만세시위가 차호공립보통학교에서 재개되었다. 200여명의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마을 일대를 행진하였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이 진행 되었고,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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