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채
白南埰1888. 1. 1 ~ 1950. 10.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1915년 교남기독청년회
- · 1923년 대구구락부
- · 1927년 12월 신간회 대구지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1월 1일 경상도 대구부(大邱府, 현 대구시)에서 아버지 백용규(白龍逵)와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자는 성숙(聖淑)이며, 호는 백천(白泉)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를 졸업하고, 1910년 22세 때 중국 교와대학(協和大學, 현 北京大學)에 유학하였다. 중국 유학 후 귀국하여 1915년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박영조(朴永祚) 등과 함께 교남기독교청년회(嶠南基督敎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회 사업을 하였는데, 교남기독교청년회는 1921년 대구기독청년회(YMCA)로 전환되었다. 1918년 계성학교의 교감 및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19년 1월 5일 대구 남산교회(南山敎會)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1919년 2월 13일 상하이(上海)에서 귀국한 서병우(徐丙佑)·김순애(金順愛)·아우 백남규(白南圭), 대구의 홍주일(洪宙一)과 이만집,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에 참가한 후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김마리아(金瑪利亞) 등과 함께 국내에서 거사할 것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2일 이갑성(李甲成)이 보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2백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남산교회 목사 이만집과 남산교회의 전도사 김태련, 그리고 신정교회의 장로이며 대구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金永瑞) 등은 3월 8일 오후 3시 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김태련의 요청을 받고, 3월 6일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과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중, 3월 7일 일제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집을 수색당하고 경찰서에 붙잡혀갔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는데, 그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남산교회 장로로 시무하며 조양연와회사(朝陽煉瓦會社)를 설립하여 경영하면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계성학교의 재정 지원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 대구의 유지들이 조직한 대구구락부(大邱俱樂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대구 학교 평의회(大邱學校評議會)의 후보(候補)로 나서기도 하였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창립에 참여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7년 5월부터 1930년 4월까지 대구 학교 평의회 의원(議員)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부터 1930년까지 2년 동안 대구상업회의소(大邱商業會議所) 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타협적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이후에도 대구지역에서 계속 활동하였으나, 전시 체제하에서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일제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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