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태근
裵太根1871. 9. 3 ~ 1923. 2.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동군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1년 9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만전동(万田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흥해(興海)이며,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배태근(裵泰根)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中坪洞) 편항시장(鞭巷市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안동군에서는 3월 13일 이상동(李相東)의 1인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3월 17일 예안면(禮安面)과 3월 18일 안동면(安東面)에서 연이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편항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 등은 이 같은 인근 지역의 만세시위에 영향을 받아 마을주민들에게 3월 21일에 만세운동을 벌일 예정임을 알리고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어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아침 일찍 중평동 편항시장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이칠성(李七星)·박철옹(朴喆雍)·이도상(李道祥)을 만나 오후에 있을 만세운동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였다. 장터에는 장꾼과 주민들 외에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나온 마을주민들도 많이 있었다. 이때 권유를 받은 이칠성·박철옹·이도상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오후 2시 유연성이 군중들 앞으로 나와 왜 만세운동을 해야 하는지 연설을 한 후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 열기가 점점 더 고조될 무렵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일제 경찰이 현장에 급히 출동하였다. 출동한 경찰 중 한 명인 우치다 스케(內田甚助)가 ‘왜 치안을 방해하느냐’고 말하며 붙잡으려고 하였다. 이에 “우리가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며, 우리가 일본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았느냐”고 항변하였다. 항변을 들은 일제 경찰은 뺨을 때리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를 본 군중들이 분노하여 체포를 저지하고 경찰에게 몰려들었다. 우치다는 놀라 주재소로 도망하였다. 이에 유연성·유곡란(柳谷蘭)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주재소에 도착하자 우치다가 권총을 쏘며 또다시 군중들을 자극시켰다. 이어 분노한 군중들과 돌과 몽둥이로 주재소 출입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책상과 의자 등 비품과 서류를 모두 파기하였고, 일제 경찰로부터 빼앗은 권총과 대검, 주재소 안의 무기들도 모두 모아 우물 안에 버렸다. 시위대의 일부는 경찰 숙소로 가서 침대와 책상·의류·유리창 등 모든 비품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5시 사기가 더욱 오른 1,5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 문과 벽, 유리창 등을 부수고 기물과 서류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격렬한 시위에 주재소와 경찰 숙소, 면사무소는 지붕과 기둥만 겨우 남아 있을 뿐 폐허에 가까웠다. 만세시위는 자정을 넘어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이어졌으며 이후에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다음날부터 일제 경찰은 대대적인 만세운동 관련자 검거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건조물 손괴, 가택침입,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동일하게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3년 2월 25일 옥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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