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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석

裵用石

1899. 8. 17 ~ 1926.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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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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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沃川)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옥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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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옥천군 이원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9년 8월 17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장찬리(長賛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배용석(裵用錫)을 사용하였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월 27일 옥천군 이원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고종 장례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육창주(陸昌柱)·육창문(陸昌文)·허상구(許相球)를 중심으로 옥천군 이원면 만세운동은 준비되었다. 이들은 김용이(金龍伊)·허훈(許訓)·허상기(許相基)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3월 15일 육창문의 자택에서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이원장터의 장날인 3월 27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주민이 있다면 강제로 참여시킬 것,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탄압한다면 모두 헌병주재소로 가서 항의할 것, 구금자가 발생하면 구금자를 반드시 구출할 것, 그것이 어려울 때는 헌병대에서 해산하지 않을 것 등을 구체적인 행동 지침으로 결정하였다. 거사일인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와 허상기는 흰 광목에 큰 글씨로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장터로 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장터에 나온 주민들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후 육창주·허상기·김용이·육창문 등은 주민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날 장터에 나왔다가 ‘대한독립만세’ 구호를 듣고 시위대 쪽으로 이동하였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육창주 등의 호소에 크게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육창주·허상기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주변의 주민들과 함께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수백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 헌병대가 곧바로 출동하여 만세시위대의 행진을 가로막고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은 곧바로 총검을 들이대며 태극기를 압수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육창주와 허상기를 헌병주재소로 끌고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김용이와 허상구 등이 만세시위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사전에 결정한 행동지침대로 만세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 앞으로 가서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 헌병대는 시위대의 요구에 불응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만세시위대를 향해 총기를 발포하여 이일만(李一萬)의 동생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예상치 못한 일제 헌병대의 탄압에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당시의 만세시위는 황망함 속에 일단 해산되었다. 하지만 이일만이 오후 3시경 죽은 동생의 유해를 운구하여 주재소 앞에서 격렬하게 항의함에 1,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다시 헌병주재소 앞으로 나가 항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들이 또 다시 총기를 발포하자, 분노하여 만세시위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헌병주재소에 대한 습격에 참여하였다. 김수원(金壽遠)·차기시(車奇矢)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며,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일제 헌병들을 구타하여 무력화시키고, 육창주와 허상기를 구출하였다. 이렇게 만세시위가 더욱 격렬해지자, 일제는 지원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때에도 2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상당수의 주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훼기(毁棄)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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