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박태흥

朴泰興

1875. 12. 11 ~ 1957. 2. 24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태흥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남 용강(龍岡)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용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진남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5년 12월 11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금곡면(金谷面) 담부리(担釜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솜(綿)이나 솜옷을 판매하였는데, 3월 1일 평남 진남포(鎭南浦)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평남 진남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승훈(李昇薰)이 105인 사건 때 함께 투옥되었던 임치정(林蚩正)과 연락을 취하면서 준비되었다. 그 외에도 삼숭학교장(三崇學校長) 홍기황(洪基璜)·노윤길(盧允吉) 등 감리교 지도자들과 2월 중순경 진남포 시내에서 비밀리에 접촉하면서 조만간 거족적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알렸다. 동시에 천도교 측에도 연락을 취하여 진남포에서의 만세운동이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진남포 만세운동을 준비한 이들은 서울·평양과 같은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진남포 신흥동(新興洞) 감리교회당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교회당에는 군중 약 500명이 집결하였고, 시위대는 ‘대한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줄지어 거리로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때 함께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시위를 해산하기 위해 일제 경찰이 총을 쏘아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이날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일자 미상일에 1심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다시 “10여 년 전부터 독립의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독립선언서를 보고 감사함과 동시에 심중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다. 징역 10월을 선고한 것은 우리 조선 민족을 금수로 인정한 판결이기 때문에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상고한다”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는 진남포에서 천도교와 사회운동 관련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천도교 청년회 진남포지회 총회 때 포덕부장(布德部長)이 되었고, 1929년 진남포체육회에서는 서무부 간사로 일하였다. 1929년 6월 19일 진남포 비석리(碑石里) 천도교 청년당 간부로서 종리원(宗理院)을 중심으로 한 조선평당(朝鮮評黨)이라는 비밀 결사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히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