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冕熙
冕熙1904. 1. 5 ~ 1945. 1.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6
- · 10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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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4년 1월 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동후면(東後面) 삼산리[(三山里), 현 안동시 예안면(禮安面) 주진리(舟津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명으로 유호백(柳虎伯)을 사용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익히다가 1922년 무렵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4학년 재학 중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주도한 만세운동 계획에 동참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은 순종이 사망한 지 1주일 뒤인 5월 초부터였다. 이들은 3·1운동 때와 같은 민족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에 뜻을 같이하고, 천도교·조선공산당의 인사들과 연대해 만세운동 준비를 추진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와 역할은 인산 당일 가두 행렬에서 만세를 선창하고 격문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사를 3일 앞둔 6월 7일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의 만세운동계획이 발각되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權五卨)이 체포되었다. 다행히 일제 경찰의 체포망에서 벗어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만세운동을 독자적으로 추진해 갔다. 6월 7일부터 급히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깃발 등을 제작하고, 격문을 작성해 6월 9일까지 등사판으로 10,000여 매를 인쇄하였다. 이와 같은 준비를 마치고 그날 밤 평소 친분이 있던 이선호(李先鎬)의 집을 찾아가 6월 10일의 거사를 의논하였다. 그리고 6월 10일 아침 중앙고보에서 격문과 태극기를 건네받은 뒤, 4학년 학생들에게 나눠 주면서 만세운동을 독려하였다. 인산 당일 일제는 장례 행렬이 지나갈 연도 양측에 20,000여 명의 학생들이 도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도열 앞뒤로는 기마경찰과 헌병·사복 경찰이 포위하며 엄중한 경계와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선호·이현상(李鉉相) 등과 함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학생들의 행렬 앞으로 1,000매의 격문과 태극기 30여 장을 배포하는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10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26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풀려난 후 1929년 5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붙잡혀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1월 25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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