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근
元泰根1882. 3. 4 ~ 1950. 6.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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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2년 3월 4일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하서면(下西面, 현 안양시 안양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원태우(元泰祐)·김태근(金台根·金泰根)이라는 이명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목표로 투석하였다. 1905년 11월 22일 오후 6시 17분경 경부선 철도 안양역(安養驛) 서북방 약 800m 부근에서 평소부터 뜻을 같이하던 이만여(李萬汝) 등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수원(水原) 지방을 구경한다는 정보를 듣고 승차한 기차에 돌을 던지기로 계획하였다. 이날 오전 9시 30분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 공사를 비롯한 일행과 함께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열차로 경기도 수원으로 출발한 이토 히로부미는 팔달산(八達山) 구경과 사냥을 끝마친 후, 6시 30분 안양 발 열차로 귀경길에 올랐다. 열차 발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강암 파편을 열차 차창을 향해 던졌으며 돌이 이토가 탄 열차 차창의 유리를 깨고 좌석에 떨어졌다. 이때 이토는 돌에 직접 맞지는 않았으나 유리 파편이 튀어 왼쪽 볼 3곳과 왼쪽 눈 1곳, 왼쪽 귀 아래쪽에 상처를 입고 약간의 피를 흘리는 경미한 부상으로 곧바로 지혈한 후 7시 30분 서울에 도착하였다. 당시 이토의 부상은 ‘요부(要部)’를 피하여 가벼운 종창(腫脹)에 그쳤다. 열차가 안양역을 지나 다음 역에 도착하자마자 호위헌병 조장 1명과 헌병 2명에게 이만여 등 3명과 함께 붙잡혔고, 본인들의 항일투쟁임을 밝혔다. 이 사건은 발생 다음날부터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각종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발행한 『일로전쟁화보』 제29권(1905년 12월 8일)에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으로 기록화와 함께 사건 내용이 소개되었다. 한국에서는 11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석자하래(石子何來)」라는 제목으로 처음 보도되었다. 이후 한국주차군 헌병대에서 동지들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이른바 「조선주차군 군율」 제4조 9항 위반 즉, 철도 방해로 구류 2월, 태(笞) 100도(度)를 받고 1906년 1월 24일에 풀려났다. 이때 심한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불구가 되었고, 일제강점기 내내 생계가 곤란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찰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고 김태근(원태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못했으니 안중근과 김태근 중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성공 여부로 보면 안중근이 김태근보다 더 훌륭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토 히로부미가 비록 안중근의 총탄에 죽었지만 그 조짐은 이미 김태근이 던진 돌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1992년 11월 22일 시민단체에 의해 안양 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원태우 지사 의거비’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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