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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년

元九年

1904 ~ 193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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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원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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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정평(定平)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정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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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정평농민조합
  • · 정평농민조합재건위원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정평농민조합 제3차 협의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부내면(府內面) 연봉리(蓮峯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34년 당시 31세로, 190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원구년(元龜年)을 사용하였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당시 김씨와 결혼하여 4명의 자식이 있었고 어머니만 생존하고 있으며, 형은 원봉년(元鳳年)이다. 1932년 7월 정평농민조합재건위원회(定平農民組合再建委員會)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정평농민조합재건위원회는 정평농민조합의 재건을 위한 조직이다. 정평농민조합은 1930년 6월 정평농민동맹(定平農民同盟)을 발전적으로 개편한 농민운동 단체이다. 노동동맹의 확립, 농민단체의 강화와 전국적 통일, 계급적 협동조합과 농민자위단의 조직 등을 행동 강령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 1월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되었다. 이에 다른 농민들과 함께 농민조합을 재건하기 위해 정평농민조합재건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을 확대해 갔다. 이른바 제2차 정평농민조합은 5개 면(面)에 지부위원회와 그 아래 28개 반(班)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속한 조합원의 인원도 847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조직과 인적 자원을 배경으로 소작관계 개선, 일제의 농업정책 반대, 각종 조세 및 부채 반대 등과 같은 농민들의 일상 이익에 관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제국주의 타도를 행동 강령으로 삼고 『재건뉴스』와 『빈농』 등의 기관지를 발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3·1운동 기념일, 6·10만세운동 기념일, 국치 기념일,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각종 격문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함흥·흥남 등지에 반전(反戰) 내용의 격문을 배포한 일이 발각되면서 대다수의 조합원들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결국 1933년 11월 제2차 정평농민조합의 조직도 와해되었다. 이때 경찰을 피하여 무사했기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다시 정평농민조합의 재건을 추진하였다. 1934년 2월 11일 밤 출타하여 집에 없을 때 한 청년 회원이 정평농민조합 관련 서류뭉치를 아내 김씨에게 맡기고 갔는데, 이를 경찰이 탐지하였다. 그 결과, 2월 12일 아내와 마을사람 45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는 당시 신문기사에 ‘정평농민조합 제3차 협의회 사건’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1934년 2월 12일 오후 2시경 정평경찰서에서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평소 건강했기에, 모진 고문을 당하여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사건은 일대 파란을 야기하며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당황한 일제는 사인규명을 위한 부검을 지시하였다. 2월 13일 일본인 검사가 지휘한 가운데 한국인 의사 김명학(金明學)의 집도로 부검이 실시되었고, 결국 구타 등에 의한 사망으로 확인되었다. 부검이 종료되고 시신은 가족에게 인도되었으며 아내 김씨도 풀려났다. 한편, 고문에 참여한 일본인 순사부장 오쿠보(大久保勇莊)와 순사 마쓰나가(松永勝一)는 1934년 5월 2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구타치사 사건으로 징역 1년 6월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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