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익
安相益1898. 3. 11 ~ 1921. 10.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1919년 강서군 반석면
- · 대동군 금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8년 3월 11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반석면(班石面) 반삼리(班三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과 대동군 사이에 있는 모락장(사천시장(沙川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上四里)와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 사이에는 5일장인 모락장이 섰다. 두 지역은 각각 강서군과 대동군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장날에는 왕래가 잦았다. 기독교 장로교 소속 교회 네 곳도 서로 인접하여 교류가 활발하였다. 상사리에는 반석교회(盤石敎會)가 있었고, 여기서 10km 떨어진 반석면 반육리(班六里)에는 사천교회(沙川敎會)가 자리 잡고 있었다. 원장리에는 원장교회에 위치해 있었고, 그로부터 남쪽으로 3km 거리의 산수리(山水里)에는 산수리교회가 있었다. 이들 교회가 연합하여 1919년 3월 4일 전개한 모락장 시위는 만세운동을 대표하는 유혈 참극 중 하나였다. 만세시위 계획은 반석교회 장로이며 사립 반석학교(私立) (班石學校)를 설립·운영하던 조진탁(曺振鐸) 장로가 3월 1일 평양(平壤)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거행된 독립선포식과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몇 장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조진탁은 귀갓길에 먼저 원장교회에 들려 장로인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玄九)를 만나 평양에서 있었던 독립선포식과 만세시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원장교회와 반석교회는 물론 산수리교회와 사천교회까지 연합하여, 원장 장날인 3월 4일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고지형·윤상열·차현구는 곧바로 원장교회 부설 사립 합성학교(私立) (合成學校) 교감 임이걸(林利杰) 장로와 산수리교회 조승익(曺承翊) 장로에게도 만세시위 준비를 당부하였다. 차현구 장로는 반석교회 최능현(崔能賢) 장로와 백이옥(白履玉) 영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최능현은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 목사에게도 거사 계획을 알렸다. 송현근 목사는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여 모락장에서의 별도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일제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을 비롯한 10여 명이 검거되자, 송현근은 조진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3월 4일 10시 원장 합성학교 운동장에서는 1,000여 명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다. 원장교회 차병규(車炳奎) 장로의 기도로 시작하여 지석용 장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임이걸이 독립선포식의 필요성을 40분간 연설하였다. 그리고 평화적 시위임을 선언하고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어 앞세우고 나팔수를 선두로 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시장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장을 한바퀴 돌고 다시 합성학교 교정으로 돌아올 때 수많은 군중이 뒤따랐다. 이때 최능현과 송현근이 모락장 시위는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알리고 헌병대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자고 호소하였다. 시위 군중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헌병대가 있는 모락장으로 향하였다. 행진을 계속하면서 시위 군중은 2,000여 명을 넘어섰다. 모락장에 거의 도착하여 언덕길을 넘으려 하자, 사천헌병분견소장 사토(佐藤實太郞)와 헌병보조원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면서 격분한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맨주먹으로 저항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사토는 헌병분견소에 몸을 숨기고 계속 총을 쏘았고, 헌병보조원들은 도망갔다. 시위 군중이 분견소에 불을 지르자 사토는 도망가다 타살당하였고 헌병보조원 2명도 맞아 죽었다. 시위군중은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을 무사히 구출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일제 헌병대가 즉시 출동하여 4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3월 4일 모락장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9명이었고, 부상자는 40여 명을 넘어섰다. 이날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49명은 평양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날 모락장 시위에서 일제 헌병을 처단하고 헌병분견대에 불을 질렀다는 이유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5년을 받았다. 1919년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만성복막염이 발병하여 1921년 10월 17일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