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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식

安商植

1865. 6. 11 ~ 1939.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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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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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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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영덕군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65년 6월 11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기성면(箕城面) 노동리(魯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은서(殷瑞)이다. 이후 영덕군 병곡면(柄谷面) 원황동(遠黃洞)으로 이주하였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장성하여서는 문장이 선비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원황동 동민들의 간청으로 구장(區長)을 맡고 있던 중,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12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까지 갔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平洞)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의 권유에 따라 기독교도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권상호(權相浩)·박희락(朴羲洛) 등이 3월 18일 영해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당시 병곡면 원황동 구장을 맡고 있던 중 정규하의 계획에 찬동하여, 원황동 주민을 규합하여 영해면 성내동 영해 시장의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원황동 주민을 이끌고 영해면 장날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영해주재소 주임순사 스즈끼(鈴木鶴次郞)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스즈끼를 비롯한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 등을 구타하였다. 또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 그리고 영해공립보통학교 훈도 배병렬(裵秉烈)과 학생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을 선도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 기구인 영해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그리고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다음날인 3월 19일에도 아침부터 지역민 7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19일 오전 11시경 영덕경찰서의 응원 요청을 받은 포항헌병대 분대장이 헌병 6명을 이끌고 영해에 도착하였다. 오후 5시경에는 대구 주둔 보병 80연대 소속 일본군 장교 이하 17명이 영해에 도착하였다. 일제 군경은 처음 강압적으로 해산을 강요하다가 시위 군중이 해산을 거부하며 ‘독립만세’를 부르자 공포탄을 발사하였고, 곧이어 실탄을 발포하는 등 무력 진압을 자행하였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임창목(林昌穆) 등 8명이 사망하였고, 남효량(南孝樑) 등 16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어서 일제 군경들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정규하·권상호·남효직·남여명 등과 함께 붙잡혀 이른바 소요죄, 공무 집행 방해죄, 건조물 및 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었다. 같은 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그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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