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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엽

裵重曄

1882. 1. 6 ~ 1935.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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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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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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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의성군 비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2년 1월 6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비안면 만세운동은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기독교도 김원휘(金原輝)로부터 촉발되었다. 김원휘는 1919년 3월 3일 평양에 체류하던 중 만세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의성으로 돌아왔다. 이어 비안면 쌍계동 장로교회 목사인 박영화(朴永和)를 찾아가 의성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구에서 학생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박우완(朴又完)과 박영화의 아들 박상동(朴尙東) 등은 대구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의 기독교계 인사와 유지들에게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렇게 기독교도와 학생들이 합심하여 만세운동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기독교계 인사인 김원휘·박영화·박영달(朴永達)은 3월 6~7일 경에 쌍계동과 괴산동(槐山洞)의 교회당에서 비밀리에 만나 “지금이 조선이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독립할 적기(適期)이며, 이러한 호기(好期)를 만났음에도 일제의 지배에 침묵으로 굴종할 수 없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에 곧바로 함께 시위운동을 준비할 동지를 규합하였는데, 이때 거사 준비 소식을 접하고 즉각 찬동하며 거사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후 박영화와 그의 동생 박영신(朴永新), 또 배달근(裵達根)·박영달 등과 함께 3월 12일 박영신의 집에서 만나 태극기 200여 개를 제작하였고, 이날 정오를 기해 독립운동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한편 비안공립보통학교 전교생 150명은 12일 오전 일제히 학교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군경과 교원은 다수의 학생을 붙잡으서 만세시위를 저지하려 했지만,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날 오후 1시경 비안면 쌍계동으로 가서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는 만세운동에 합류하였다. 이때 쌍계동 박영신의 집 앞 도로에 운집한 학생과 마을 주민 200여 명에게 동지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며 거사를 알렸다. 그리고 시위대의 전열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온 동네를 행진하는 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친 후 시위대를 자진 해산시켜 평화적인 집회를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그날 오후 4시 만세시위에 관한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조선인 경부와 순사부장을 급파하여 비안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 주도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검거했는데, 이때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1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9일 가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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