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인
裵鍾仁1901. 11. 19 ~ 1965. 12.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8)
관련 사건
- · 창원군 읍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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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8) 1901년 11월 19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웅동면(熊東面) 두동리(頭洞里)에서 태어났다. 4월 3일 창원군 웅천면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창원군에서는 8차례 만세시위와 3차례의 시위 계획이 있었다. 최초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3일 5,000여 명의 대규모 군중이 참여한 창원군 창원면 읍내 시위였다. 시위 계획은 3월 20일 웅천면 성내리(城內里)에서 먼저 있었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만세시위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후 4월 말까지 군내 각 지역에서 계속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웅천면의 경우 3월 23일 이후 군내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만세시위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읍내 사립 계광학교(啓光學校) 직원이며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주기용(朱基溶)은 군내 각지의 만세시위에 자극을 받아 웅천 지역 민족주의 인사들에게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정운조(鄭雲朝)·문석주(文碩柱)·김병화(金炳化)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만세시위 준비 작업을 하였다. 거사일은 4월 3일로 잡았고, 장소를 옮겨가며 군중 동원을 위한 마을별 연락과 태극기 제작 등의 거사 준비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동참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거사 계획 주도 인사 중 정운조와 문석주가 도중 발각되어 일제 헌병대에 붙잡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위기 상황이었으나, 이들이 모진 고문에도 계획을 누설하지 않아 거사 준비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1919년 4월 3일 오전 11시경부터 웅천면 마천리(馬川里)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때 미리 제작한 태극기 등을 소지하고 면사무소 앞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군중들을 포함하여 500~6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주도자들과 함께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시위대의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웅천 읍내 중심가를 향해 행진하였다.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약 3,000명으로 불어났다. 수천 명 규모의 만세시위가 읍내 전역으로 확산하자,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웅천의 일본군 헌병대는 총검을 휴대하고 적극적인 시위 진압에 나섰다. 진해에서도 일제 헌병과 경찰이 강제 해산과 진압을 위해 급파되었다. 이들은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두르며 야만적인 진압을 개시하였고, 시위대는 결국 오후 2시 30분경 해산하였다. 시위대가 흩어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주모자 체포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2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다시 붙잡혀, 1921년 4월 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1927~1929년에는 신간회 창원지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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