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和烈
朴和1898. 3. 4 ~ 1936. 11.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관련 사건
- · 창원군 읍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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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0) 1898년 3월 4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창원면(昌原面) 도계리(道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창원군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창원군에서는 1919년 3월 23일 읍내에서 5,000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고, 4월 2일 장날을 다시 6,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창원읍 시위는 군내에서 발생한 8차례 만세시위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배중세(裵重世)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설관수(薛灌洙)는 지역 인사들과 거사를 논의하였다. 여기에 공도수(孔道守)·조윤호(曺潤鎬)·조희순(曺喜舜) 등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고,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및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 분담 등에서 역할을 맡았다. 두 차례의 창원읍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주도층과 함께 군중들 앞에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고, 시위 행진 때에는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일제 군경은 군내 중심가에서 최초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총력을 기울여 해산 작전에 나섰다. 군내 주재소 경찰과 헌병은 물론 마산의 중포병대대, 진해요항부 해군 육전대(陸戰隊) 병력까지 지원받아서 진압에 나섰다. 일제는 총검을 휘두르며 평화적인 시위대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전개하였다. 3월 23일 1차 시위부터 중상자를 포함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수십 명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분노한 군중들은 4월 2일의 2차 만세시위 때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차 때보다 많은 6,000여 명이 집결하였고, 시위 양상도 보다 격렬해져서 일제 군경이 후에 겨우 해산시켰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1919년 9월 1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마산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3월 16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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