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愛羅
愛羅1894. 1. 7 ~ 1922. 9.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애국부인회
- · 공주 영명여학교
- · 평양 정의여학교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94년 1월 7일 서울에서 시종(侍從)을 지낸 이춘식(李春植)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본명은 이심숙(李心淑)이다. 이명으로는 이애일라(李愛日羅)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07~1908년 무렵 이화학당(梨花學堂) 중등과에 들어가 1912년 3월 이전에 졸업했다. 이화학당 중등과 졸업 후 잠시 모교 교사로 있다가 1912년 봄 북감리회 선교사 샤프 부인(Mrs. Sharp)과 이화학당 당장 프라이(Lulu Emma Frey)의 추천과 중매로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學校, 현 공주영명고등학교)에서 한문 교사였던 이규갑(李奎甲)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남편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영명여학교 교사를 맡았다. 1917년 5월 남편과 함께 공주에서 여자야학교를 설립하여 남편은 교감을 맡고, 자신은 교사를 맡아 이신애(李信愛)와 함께 3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후 이규갑이 평양 기홀병원(평양연합기독병원)과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전도사로 파송되자 남편을 따라 평양(平壤)으로 이주하여 평양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사를 맡았다. 1919년 3월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평양경찰서에 10일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석방 후 남편을 돕기 위해 갓난아이인 막내딸을 업고 친정이 있는 서울에 올라왔다. 1919년 4월 백일이 갓 지난 아이를 업고 아현동(阿峴洞) 고개를 넘어 친정 형님집으로 가던 중 일본 헌병이 아이를 빼앗아 내동댕이치고 붙잡았다. 남편인 이규갑이 홍면희(洪冕喜)와 함께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1919년 4월 중순 이후에도 국내에 남아 시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돌보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1920년 수원(水原)·공주(公州)·아산(牙山) 등 지방교회에 다니면서 비밀리에 애국부인회를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아산을 거쳐 충남 천안(天安)으로 이주하여 양대여학교(良岱女學校) 교사로 있다가 경찰의 요시찰인물로 가족을 데리고 1921년 여름 남편과 시숙인 이규풍(李奎豊)이 거주하고 있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망명 도중 함경북도 웅기항(雄氣港)에서 경찰서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다가 건강이 악화되었다. 심문을 받던 중 사망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한 경찰이 의사를 불러 진찰하게 하였는데, 마침 그 의사가 이규풍의 아들로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이민호(李敏鎬)였다. 이민호의 도움으로 일제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고된 여행과 일제 경찰의 고문 후유증으로 그곳 병원에 입원했다가 1921년 9월 4일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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