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命夏
命夏1878. 1. 23 ~ 1921. 2.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 · 이진용 의병부대
- · 대한독립단
- · 보합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78년 1월 23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대왕면(大旺面) 궁촌(宮村,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우문(又文)이다. 호는 몽학(蒙鶴) 또는 몽운(夢雲)이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계윤(桂允)이다.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후에 양부가 되는 부친 이인협(李寅協)의 형인 백부 이인규(李寅奎)가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영월(寧越)·안악(安岳)·신계(新溪)·장연(長淵) 등에서 군수를 지냈고 후에는 정3품까지 오른 것을 보면,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양반 계층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887년 9세 때 시국이 혼란하자 부모와 함께 제천(堤川)으로 이사와 10세가 되는 1888년부터 4년 동안 유인석(柳麟錫) 문하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특히 제천으로 온 것은 조부 이재연(李在淵)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본적은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성산면(城山面, 현 금성면) 명지리(明芝里, 현 제천시 명지동)이다. 1896년 3월에 스승 유인석이 호좌의진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항일투쟁을 위해 북상하자 자신도 그 대열에 뛰어들겠다는 뜻을 부모와 상의하였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던 부모의 만류로 북상을 포기하게 되었고, 1898년 초가을 같은 마을의 유지인 정씨 집안의 딸 정운이(鄭雲伊)와 결혼하여 다음 해에 아들 범철(範哲)을 낳았다. 하지만 의병에 참여하고 있던 동문들과 교류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20세가 되던 1898년 윤 3월에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 다녔다. 1901년 졸업을 하고 대한제국의 행정 법규에 따라 시험을 치루고 주사(主事)로 발령받아 1902년 제천으로 돌아왔다. 시국을 염려하고 있던 뜻을 같이 하는 황학수(黃學秀) 등 유지들과 연합하여 1905년에 제천에다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세워 지역민들을 교육시켰다. 1907년 일본은 통감정치를 실시하며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자 관직을 팽개치고 이강년(李康埏)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을 모으는 직책인 소모장(召募將)이 되었다. 의병활동의 기세가 오르자 13도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이 이강년 의병부대에도 하달되어 장도에 올랐지만,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 작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의병부대가 와해되는 상황에 이르자 타 지역을 전전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연해주에 있던 스승 유인석이 국내 진공을 위해 1910년 6월 21일 13도 의군을 조직하고 도총재가 되어 국내진공작전을 실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호응하기 위해 42명의 동지들과 연합하여 의병들을 모으는 「통문」에 서명하고 전국에 반포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국내에서의 활동 여지가 없어지자 북상을 결심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동기는 유인석 문하의 의병들 중 1907년부터 유격대장이 되어 황해도 서남 일대를 휩쓸고 다니던 이진용(李鎭龍) 의병장을 찾아 서북지역으로 가서 함께 활동하고자 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진룡의 장인인 우병열(禹炳烈)과는 돈독한 교류를 하고 있었고, 같은 동향이었다. 1910년 가을에 북상해 본격적인 무장활동에 뛰어들어 일본군 열차를 습격하여 보급선을 차단하는 등 50여 차례에 걸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자 일본은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1911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대토벌전을 황해도 지역에서 자행하였고, 그 결과 이진용 부대원 250여 명이 희생되는 바람에 만주 서간도지역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1911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망명한 이진용은 다른 의병 가족 13가구와 함께 콴뎬현(寬甸縣) 청산구(靑山溝) 은광자촌(銀鑛子村) 자루골로 이주해 가, 이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 산속에 매복해 있는 의병들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는 등 새로운 방식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일본에 대항하는데 좋은 조건이 구비된 지역 즉 평정산(平頂山) 난천자(暖泉子) 고려구(高麗溝),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 보락보진(普樂堡鎭), 콴뎬현 청기산진(靑倚山鎭), 콴뎬현 우모오(牛毛塢)·홍통구(弘通溝)·향로구(香爐溝)·하로하(下露河)·합니하(哈泥河) 등을 전전하며 일본 군경을 처단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영도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19년 4월 15일 중국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보약사·농무계·향약계·포수단 등의 대표 및 다른 의병계열의 인사 등 560여 명이 자신들의 단체를 해체하고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構) 대화사(大花斜)에다 본부를 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창단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의병을 기간으로 하면서 한국으로부터 건너오는 청년들을 받아들여 남만주 제1사단이라는 무장조직을 갖추었다. 이 사단은 본부와 4개의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19년 8월 중순에 이르면 병력이 1,500명이나 되었다. 이때 삼도구(三道溝)에 있던 제3중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각 부대별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 영내로 들어가 일본 군경의 주재소를 습격하고 친일분자들을 처단했다. 이처럼 한국독립군이 급속히 성장하자 일본은 ‘경신대토벌(庚申大討伐)’이라는 만주 독립군기지 침공작전을 세웠다. 일본이 5개 사단에 약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 동만주와 남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에 대한 대공격을 진행하자 이들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거의 초토화 되었다. 그러자 동만 지역에 있던 독립군부대는 러시아 지역으로 넘어가 재기를 도모했으나, 남만에 있던 한국독립군 부대와 민단(民團) 등은 분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 대한독립단 제3중대 대원들은 국내진공작전을 끝내고 원래의 주둔지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토벌대와 맞부딪치게 됨으로서 귀환이 늦어져 류허현에 있던 본진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3중대 대원들은 의주에 머무르면서 본대의 행방을 탐문하였지만,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느낀 대원들이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몇 명의 대원들과 평북 의주로 갔다. 1920년 5월 하순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정산동(停山洞) 김중량(金仲亮), (金時晄)의 집 뒤 산에 있는 굴을 임시 근거지로 하여 성립된 단체인 보합단(普合團)의 단원들과 연합했다. 8월에는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외상면(外上面) 안평동(安平洞) 박초식집에서 폭탄을 제조하여 용천·의주·선천(宣川) 등에서 친일파 관리와 부호들을 위협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 화창(火槍)과 수창(手槍)을 선천·철산(鐵山)·용천·의주 등지에서 구입하여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밀정 등을 처단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보합단 단원이 되었다. 이들은 대개 2~3명이 1조가 되어 권총 1정씩을 휴대하고 활동을 하였는데, 이는 적의 추적을 피함과 동시에 조직이 발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러나 결국은 근거지가 발각되자 2개의 대열로 나뉘어 타지로 이동해야 했는데, 이동 도중 일제 군경 수백 명에게 쫓기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적·화력에서 열세인 단원들은 간신히 탈출했으나 함께 이동하는 것이 불리했기에 여러 조로 나뉘어 흩어져 각자의 살길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가 소속된 조는 익숙해 있던 콴뎬지역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1920년 10월 일본 육군 제19연대가 또 다시 동변도(東邊道) 한인 거주지구에 대해 토벌 작전을 감행하는 바람에, 일행은 다시 거점을 안둥(安東, 현 단둥(丹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21년 2월 2일 단원들과 안둥현(安東縣) 삼도구(三道溝)에 와서 군수품을 마련하던 중 일본영사관 분관의 경찰을 처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삼도구 부근으로 밀려가 대치하면서 일본 경찰 대장 오카무라(岡村) 경부보(警部補)와 한인 순사 주계주(朱啓柱)를 처단하고 수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일제경찰은 곧바로 평안북도 제3부 경찰대와 의주경찰서에서 다수의 응원대를 급파하였고, 안둥현에서 수 명의 응원 경관을 파견하여 지원하는 바람에 단원 7명 중 3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생존 단원들과 함께 주롄청(九連城) 부근 중국인 소운수(蘇雲樹)의 집으로 이동하여 향후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뒤를 쫓고 있던 일본군 탐정이 이곳을 알아내고 일본군에게 알리자 의주경찰서와 평북 제8부 경찰대 30여 명이 습격을 가해 왔다. 단원들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전투에 임하다 전 대원 15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시신들은 압록강에 던져졌다. 1921년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북 경찰서 형사과장 이경근(李巠根)의 주선으로 혈흔이 있는 이력서와 인장을 찾아와 제천에 가분묘를 조성하여 의대장을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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