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求
東求1886. 10. 28 ~ 1933. 10.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천도교중앙총부
- · 조선형평사혁신동맹총본부
- · 고려혁명당
포상 정보
- · 애국장(2001)
관련 사건
- · 1926년 고려혁명당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1) 1886년 10월 28일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횡성면(橫城面) 영영포리(永永浦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이소(李而笑)이다. 1919년 천도교중앙총부 의사원(議事員)으로 일하면서 3월 14일 횡성군에서 올라온 천도교인 장도훈(張道勳)에게 독립선언서 40장과 태극기 20장을 전달하였다. 횡성에서는 3월 27일, 그리고 4월 1일부터 6일까지 천도교인이 주도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1921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아들인 최동희(崔東羲)가 주도한 천도교 혁신 운동에 가담하여 혁신파로 활약하였다. 천도교 혁신 운동의 일환으로 천도교인이 직접 투표를 통해 대의 기구인 의정회의 의정원(議正員)을 선출할 때, 횡성을 대표하는 의정원에 당선되었다. 1922년 4월에는 천도교 조직 개혁으로 새로이 등장한 대의 기구인 종의원의 종의사(宗義師)에도 횡성 대표로 선출되었다. 1922년 7월에 최동희의 주도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인 고려혁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고문 이종훈(李鍾勳), 위원장 홍병기(洪秉箕) 등 천도교 혁신파가 주축이 되어 만든 고려혁명위원회에는 국내조직부장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12월에 혁신파가 보수파와 결별하며 천도교연합회를 창설할 때도 참여하였다. 1925년 4월 6일 천도교연합회 정기총회에서 선전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3년 4월 경남 진주(晋州)에서 백정 출신에 대한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한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가 창립되자 천도교 혁신파인 유공삼(柳公三)과 함께 가입하였다. 형평사가 창립 1년 만에 진주에 있던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문제로 갈등하다가 1924년 4월 장지필(張志弼) 등이 형평사혁신동맹총본부를 발족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장지필 등은 본부를 서울로 이전할 것과 사회주의적 노선의 형평 운동을 지향하였다. 그런데 갈라선 양측은 곧바로 통합 논의를 시작하였다.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1924년 8월 16일에 열린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 임시대회에서 횡성 지역을 대표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통합은 다시 난관에 부딪혀 표류하였다. 1925년에 들어와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 사건이 반복되면서 반형평운동이 일어나자 결국 양측은 사회단체의 중재로 1925년 4월 24일과 25일에 전조선형평대회를 열고 합동을 결의하였다. 이때 임시의장 및 중앙검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8월 만주 창춘(長春)에서 최동희를 만나 만주의 정의부(正義府), 국내의 천도교 혁신파와 형평사를 연계하여 무장 투쟁과 외교 공작을 펼치는 민족유일당을 만들 것을 논의하였다. 1926년 3월 서울에서 천도교연합회 지도자인 김봉국(金鳳國)·송헌(宋憲)·이동락(李東洛)과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 간부인 오성환(吳成煥) 등을 만나 최동희의 뜻을 전하고 함께 하기로 결의하였다. 곧바로 김봉국·이동락과 함께 오성환·송헌의 위임장을 지니고 지린(吉林)에 도착하였다. 3월 25일에는 김봉국·최동희·이동락, 그리고 정의부 간부인 양기탁(梁起鐸)·고활신(高豁信)·이일심(李一心)·현정경(玄正卿), 러시아에서 들어온 주진수(朱鎭壽)·김광희(金光熙)·이규풍(李圭豊) 등과 함께 선언·강령·당규 등을 논의하였다. 3월 29일에는 당명을 고려혁명당으로 결정하였다. 4월 5일에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이 정식 창당하면서 책임비서의 자리에 올랐다. 고려혁명당은 창립 후 정이형(鄭伊衡)이 이끄는 정통단(正統團)이라는 무장 부대를 조직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고, 최동희는 당대표 자격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베이징(北京) 공사인 레프 카라한(Lev. Karakhan, Лев Караха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대표인 보이친스키(G. Voitinsky, Войтинский)를 만나 고려혁명당에 대한 지원과 승인을 요청하였다.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당수 장제스(蔣介石)에게도 군사 지원을 호소하였다. 1926년 12월 28일 이동락이 하얼빈(哈爾濱)으로 가던 도중 창춘의 동아정미소(東亞精米所)에서 붙잡혔다. 체포 당시 고려혁명당 관련 일체 서류를 지니고 있어 간부 명단이 노출되고 말았다. 이 소식에 정이형과 함께 하얼빈으로 피신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1927년 3월 하얼빈의 박경종(朴慶鍾)이 경영하는 농업공사(農業公司)에서 정이형·유공삼 등과 함께 붙잡혀 하얼빈총영사관을 거쳐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27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곧바로 항소하여 1928년 10월 1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다.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후 줄곧 병감(病監)에서 지냈다. 1931년 10월 7일에 반신불수의 몸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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