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선
尹昌善1901. 1. 22 ~ 1972. 12.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관련 사건
- · 신민부 관련 군자금 모금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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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0) 1901년 (음)1월 22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부북면(府北面) 무연리(舞鳶里)에서 아버지 윤세용(尹世茸)과 어머니 박복택 사이의 6남 3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이명은 윤재선(尹在善)·윤승한(尹承漢)이며, 김광로(金光魯)라는 가명도 썼다. 1911년 부친과 숙부 윤세복(尹世復)이 함께 가산을 정리하고 남만주(南滿洲)로 망명할 때 동행하여 환런현(桓仁縣) 난쿠안(南館)에 정착하였다. 1911년 부친과 숙부가 설립한 동창학교(東昌學校)에 들어가 다니다 1913년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 부근)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폐교되니 3학년으로 중퇴하였다. 20세 때 귀국하여 이갑성(李甲成)의 조카인 진주(晉州)의 이옥경(李玉瓊)과 결혼하고 처남 이동희(李東熙)와 함께 3년간 서적상을 하다 그만두고 만주로 돌아갔다. 1927년 4월에 재입국하여, 대구부(大邱府) 덕산정(德山町, 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의 고모부 이상홍(李相鴻)의 집에 일시 거처를 정하였다. 그리고는 1920년 서울에서의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붙잡혀 옥고를 겪고 6년 만에 출옥한 사촌형이자 윤세복의 아들인 윤홍선(尹弘善)을 맞아 동숙하며 휴양토록 했다. 그렇게 윤홍선과 같이 지내는 동안에 그와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에서 같이 복역한 바 있고 출옥 후 대구에 살고 있던 전 의병대장 손양윤(孫亮尹), 전 광복단원(光復團員) 신현규(申鉉圭), 밀양 출신의 대구 거주자인 독립지사 손호(孫滸)를 알게 되어 사귀었다. 그러면서 서로 약정하기를, 인근 지역 부호층을 상대로 군자금을 많이 거두어 그 돈으로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한 후에 신민부(新民府)와의 연계 하에 무장독립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1927년 10월 밀양의 윤치백(尹致伯)과 손봉현(孫鳳鉉)이 찾아와서 밀양군 단장면(丹場面) 사연리(泗淵里)의 자산가이며 손봉현의 장인(丈人)인 김태진(金泰鎭)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낼 것을 제안하니 수락하고 그 방책을 밀의하였다. 그에 따라 동년 12월, 손봉현이 처남 김용출(金龍出)을 해원도(解怨道)라는 유사종교를 내세워 서울로 유인해갔고, 대기 중이던 윤홍선이 김용출을 인계받아 교주 면회를 빙자하고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데리고 갔다. 연후에 김용출이 김광로(金光魯, 윤창선의 가명)에게 차용금 3천원 변제조(辨濟條)로 발행한 것처럼 된 약속어음을 필적 모방으로 위조해놓고, 그런 내용으로 김용출이 김태진에게 보내는 편지도 위조하여 우송하였다. 그런 후 ‘김광로’로 위장하고 김태진을 찾아가서 어음을 제시하며 기일 내 지불을 요구하였다. 김태진이 이에 순순히 응하지 않자, 손호의 손을 빌려 독촉장을 작성해서 내용증명으로 보냈다. 손봉현은 장인을 찾아가 김용출의 3천원 차용이 사실이라고 허위증언하면서 지불을 권고했으며, 김태진의 친지 김홍규(金弘圭)까지 나서서 설득하게끔 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김태진이 대구로 와서 3천원 전액을 지불하므로 받았다. 그 돈에서 400원 가량씩 윤치백·손봉현·김홍규에게 나누어주고 비용 100원을 제한 나머지 금액 1,700원 중 430원을 손양윤·신현규·손호 3인에게 배분하였다. 570원은 본인 생활비로 썼다고 한다. 그리고는 근래 밀입국해 있던 매제(妹弟) 이병묵(李丙黙)과 함께 1928년 1월 남만주로 가서, 환런현(桓仁縣) 인근의 펑황청(鳳凰城)에 사는 친형 윤우선(尹遇善)을 만나 잔액 700원(먼저 송금해주었던 100원 포함)을 전부 건네주었다. 2년 간 참의부(參議府) 참의장을 지내고 얼마 전 퇴임하여 집에 있던 아버지도 만나보았다. 그러나 지린으로 가서 신민부와 연락하여 후속 모금용 권총을 사오겠다고 한 언약은 지키지 못한 채 동년 3월 대구로 돌아왔다. 그 후 사전 정탐해 둔 경북 칠곡군(漆谷郡) 왜관면(倭館面) 매원리(梅院里) 이상기(李相琦)의 집과 경산군(慶山郡) 자인면(慈仁面) 남산동(南山洞) 김두남(金斗南)의 집을 손양윤 등 동지들에게 일러주어, 4월까지 사이에 1,000여 원의 군자금이 더 거두어지게끔 했다. 그 중 400원을 손양윤이 이병묵으로 하여금 신민부로 보내도록 했다는데, 이병묵은 그렇지 않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1928년 7월 말에 윤치백의 지인 서모(徐某)의 밀고로 종로경찰서(鐘路警察署)의 수사가 개시됨에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엄중한 취조를 받고 송국되었다. 유가증권·사문서의 위조·행사, 사기죄,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192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만기출옥 후 1934년 가족과 친지들이 옮겨가 있는 북만주 닝안현(寧安縣)으로 갔다가 1942년 귀국하여 진주에서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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