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자오런(송교인)
宋敎仁1882. 4. 5 ~ 1913. 3. 2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화흥회
- · 중국동맹회
- · 중국국민당
- · 신아동제사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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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장(1968) 1882년 4월 5일 중국 후난성(湖南省) 타오위안현(桃源縣) 상향충(上香冲)에서 태어났다. 자는 둔초(遯初·鈍初)이고 일본 유학시절 송련(宋鍊)으로 개명하였다. 호는 도원어부(桃源漁父)이며 어부로 약칭하기도 하였다. 6세에 사숙에 들어갔고 12세에 부친이 사망하자 형이 부양하였다. 1899년 3월 도원의 장강서원(漳江書院)에 들어가 1902년 겨울까지 공부하였다. 형법 및 지리 등에 관련한 서적을 주로 읽으며 학우들과 동서양의 정치 득실과 고금(古今)의 전쟁에 관해 이야기 하였다. 후일 여러 문장 및 우인(友人)들과의 담화에서 후난 출신 청궈판(曾國藩)이 창도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시무(時務)를 중시하는 학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였다. 1901년 과거시험의 첫 관문을 통과하여 수재(秀才)의 공명을 얻었다. 1902년 겨울 우창(武昌)으로 가 미국성공회의 지원으로 장즈퉁(張之洞)이 새로 세운 원화서원보통중학당(文華書院普通中學堂, 현 화둥사범대학) 입학시험에 1등으로 합격, 다음해 입학하였다. 재학 기간 신지식을 널리 받아들이는 한편 우루전(吳祿貞) 등이 조직한 혁명단체의 활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혁명의 길로 접어들었다. 1903년 8월 우창에서 황싱(黃興)을 만나 더욱 혁명의 뜻을 굳혔다. 얼마 뒤 후난으로 돌아가 혁명단체 조직을 위해 창사(長沙)·창더(常德) 일대에서 연락 업무를 수행하였다. 1903년 11월 4일 황싱·유규일(劉揆一)·진천화(陳天華) 등과 공동으로 화흥회(華興會)를 성립하였다. 1904년 2월 25일 구제달로(驅除韃虜)·회복중화(恢復中華)를 기치로 내건 화흥회가 창사에서 정식으로 성립되어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화흥회 성립 직후 우창으로 되돌아가 6월 지부 성격의 과학보습소(科學補習所) 조직을 창도하고 성립대회에서 문서를 담당하였다. 화흥회원들이 츠시태후(慈禧太后, 일명 서태후)의 70세 생일인 11월 16일을 거사일로 삼아 후난성 5곳에서 동시에 기의를 모의할 때 창더지역의 기의사무를 책임졌다. 그러나 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밀이 탄로된 데다 혁명에 참가한 혐의로 학당에서도 제명되자 상하이(上海)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4년 12월 쥰덴중학(順天中學)에 들어가 1905년 6월까지 일본어와 영어를 배운 뒤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 전입하였다. 6월 24일 황싱·진천화·정가정(程家檉) 등 10여 인과 『이십세기지지나(二十世紀之支那)』 잡지를 창간하고 비밀리에 잡지를 중국으로 반입하여 혁명사상을 고취하였다. 7월 28일 ‘이십세기지지나사’에서 쑨원(孫文)과 처음으로 만나 중국혁명세력의 결집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8월 13일 일본 유학생들이 개최한 쑨원환영대회의 주석을 맡아 조직과 영도능력을 발휘하였다. 1905년 8월 20일 도쿄(東京)에서 중국 각 혁명단체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지닌 중국혁명동맹회(동맹회)가 성립되어 사법부 검사에 피선되었다. 동맹회 성립 후 『이십세기지지나』 잡지는 『민보(民報)』로 개칭하여 동맹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9월 10일 중국학생총회관 평의원에 추대되었다. 11월 2일 일본 문부성이 청국공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유학생취체규칙」을 반포하자 양탁림(楊卓林)·닝타오위안(寧調元)·후잉(胡瑛) 등과 연합회를 발기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청국주일공사의 요청으로 12월 학교에서 제명되고 축출령이 내려졌다. 결국 육군사관학교 진학의 뜻을 포기하고 1906년 1월 송련으로 개명하며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유학생부 예과에 입학하였다가 얼마 뒤 호세이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이후 『민보』에 다수의 문장을 발표하여 혁명의 당위성을 널리 선전하였다. 소년시절부터 지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데다 일본 도착 초기 마침 러일전쟁 기간이었던지라 동삼성(東三省)과 한국의 역사지리에 더욱 주목하여 관련 자료를 널리 수집하였다. 또한 법률과 정치 및 외국의 제도 등에 많은 관심을 보여 『아국제도요람(俄國制度要覽)』·『일본헌법(日本憲法)』·『각국경찰제도(各國警察制度)』·『미국제도개요(美國制度槪要)』 등을 번역하였다. 이처럼 평소 제도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 중화민국 성립 후 중국이 독재자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내각제가 적절하다고 주장한 배경이었다. 1906년 4월 동맹회 경리부 부원, 1907년 1월 서무부 간사에 임명되었다. 1907년 4월 바이위환(白逾桓) 등 동지들과 동삼성으로 들어가 마적두목 마협(馬俠)의 도움을 받아 반만(反滿) 활동을 전개하며 동맹회 랴오둥(遼東)지부를 조직하였다. 비밀리에 무장조직을 결성하다 발각되어 바이위환이 체포되자 변장하고 다시 일본으로 향하였다. 현지 활동의 경험을 통해 동삼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욱 깊이 인식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1907년 가을 중·일 간에 간도문제를 둘러싼 교섭이 발생하자 한·중·일 3국의 관련 자료를 널리 참고하여 『간도문제』(1908년 8월 송련 명의로 상하이에서 출판)를 편찬하여 우편으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보내 교섭 시 참고하도록 하였다. 이 일로 위안스카이는 주일공사를 통해 외교관직을 맡아주기를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중화민국 성립 후에는 주일공사로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간도 점거가 동삼성 전부를 차지하고 나아가 전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야욕의 첫걸음이라고 설파한 책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일본의 반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1908년 봄 동맹회 내부의 각기 다른 관념과 견해를 가진 인사들 간의 오랜 갈등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이때 쑨원의 영도방침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쑨원 축출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황싱의 저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1910년 6월 황싱의 주선으로 하와이에서 일본에 도착한 쑨원과 두 차례 회동하였으나 여전히 혁명노선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다. 10월 11일 상하이에서 『민립보(民立報)』를 창간한 위유런(于右任)의 요청으로 12월 귀국 총주필을 맡았다. 1911년 2월 8일부터 3월 27일까지 『민립보(民立報)』에 6차례에 걸쳐 발표한 「동아최근20년시국론(東亞最近二十年時局論)」에서 일본의 조선 병탄(倂呑)은 동아 쟁패를 위한 첫걸음이라며 일본의 팽창에 대한 세인(世人)의 관심을 촉구하였다. 당시 어부라는 필명으로 다수의 선전문장을 집필하는 한편 창지앙(長江) 유역의 혁명공작을 추진하였다. 1911년 봄 홍콩 통주부(統籌部)가 광저우(廣州) 거사를 준비할 때 홍콩으로 가 통주부 편제과장 및 참모를 맡아 일체의 포고령·포고문을 기초하고 몸소 광저우에 잠입하여 거사에 동참하고자 하였다. 광저우 도착 하루 전 이미 거사가 실패로 마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선후문제를 처리하였다. 1911년 7월 31일 상하이에서 탄런펑(譚人鳳)·천치메이(陳其美) 등과 동맹회 중부총회를 조직하여 총무부 간사에 당선되고 상하이와 창지앙 중·하류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10월 10일 우창 기의가 폭발하자 10월 28일 황싱과 함께 우창에 도착하여 혁명정부의 법률공작에 참여하고 혁명을 영도하였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각 성(省)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에 우창을 떠나 창지앙 하류를 돌며 각지 혁명군의 의견을 조절하여 12월 2일 난징(南京) 광복을 이끌어 내었다. 난징 광복은 우한삼진이 청군에 의해 점령될 위기를 면하게 하였으며 혁명군의 승리와 성공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2월 초 난징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조직 공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12월 25일 오랜 망명생활을 마친 쑨원이 귀국하자 이전의 반감을 떨쳐버리고 상하이로 가 쑨원을 맞이하였다. 그해 12월 26일 쑨원이 상하이에서 소집한 최고간부회의에서 정부조직방안이 논의될 때 장래 정체(政體)로 책임내각제를 택할 것을 시종 강력히 주장하여 쑨원과 의견을 달리 하였다. 일부 인사들마저 내각총리의 최적인물로 추켜세우면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임시대총통 취임 전 쑨원이 내무총장으로 지목하였던 계획도 취소되어 격이 낮은 법제국장에 지명되었다. 1912년 1월 1일 난징에 중화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1월 12일 법제국장에 임명되었다. 법제국장 재임기간 쑨원이 임시대총통의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하였을 때에도 책임내각제만이 위안스카이의 야심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같은 해 3월 11일 공포된 「중화민국임시약법」의 기본정신이 「임시정부조직대강」과는 달리 총통제가 아닌 책임내각제에 바탕을 둔 것도 그의 평소 주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1912년 1월 13일 동맹회 총부가 난징으로 이전하자 쑨원의 지정으로 3월 4일 정사부 주임간사에 임명되었다. 4월 27일 쑨원이 임시대총통직을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오른 뒤 성립된 베이징(北京)정부 탕사오이(唐紹儀) 내각의 농림총장에 임명되었다. 비록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지만 3개월간 농림총장에 재직한 동안 업무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하여 시험장(농업·임업·목축)과 농정강습소 설립 등을 주도하였다. 탕사오이가 위안스카이의 「임시약법」 파괴에 불만을 품고 사직하자 덩달아 7월 15일 사직하였다. 이때의 풍파를 겪으면서 선명한 입장을 지닌 정당 조직만이 야심가의 책동과 이에 부화한 정객들에 의한 정국 혼란을 막을 유일한 방안임을 재확인하고 일관된 입장에서 동맹회를 정당조직으로 개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8월 20일 국무총리 루정샹(陸徵祥)이 참의원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하여 사퇴하자 위안스카이로부터 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였다. 난징임시정부 시절부터의 주장이 마침내 실현되어 8월 25일 동맹회가 여타 4개 정단과 결합하여 국민당으로 개조되었다. 쑨원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베이징에서 열린 성립대회에서 이사로 추대되었고 성립대회 후 베이징을 떠난 이사장 쑨원의 명에 따라 이사장 직무를 대리하였다. 책임내각제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총통의 자리는 위원스카이에게 양보할 수 있으나 책임내각제의 정신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 내각은 반드시 정당에 의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혁명동지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국민당에 대적하기 위해 몇 개의 소규모 정단이 합병된 공화당이 탄생하고, 후일 량치차오(梁啓超)도 공화당 가입 의사를 밝히면서 표면적으로 양대 정당이 대치하는 모습이 갖춰졌다. 당시 쌍방은 첫 번째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구미식 선거활동 방식도 선을 보였다. 1912년 10월 18일 베이징을 떠나 잠시 고향에 들른 뒤 공화당에 맞서 우한·항저우·난징·상하이 등 창지앙 하류 유역 중요 도시를 돌며 연설을 통해 국민당의 정강을 널리 선전하는 한편 내정과 외교 등 방면에서 집정자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하여 유권자들의 동정을 얻고자 하였다. 선거활동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시정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한 것이 위안스카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이에 주변 인사들이 조심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새로운 기운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는 집정자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아랑곳하지 않고 집권자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였다. 유세기간 분노와 경계심을 동시에 품은 위안스카이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차례 수표를 전달하였으나 모두 되돌려 주었다. 1912년 겨울부터 1913년 봄까지 국회의원 선거로 바쁜 와중에도 한국 독립운동 전개를 위한 한·중 연합단체로는 최초의 조직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후한민(胡漢民)·천치메이 등과 가입하고 신규식·박은식·김규식·신채호·조소앙 등과 교유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3년 2월 대선 결과 국민당이 대승을 거두어 국회 의석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유럽의 내각제 관례에 따라 국민당의 실제적인 영수로서 장래 국무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세간의 관심은 과연 누가 총통에 추대될 것인지에 집중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여론이 본인에게서 멀어지자 비상한 수단을 준비하는 한편 음모를 감추기 위해 국사를 논의하자며 북상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요청에 따라 베이징으로 향하기 위해 상하이기차역(현 상하이철도박물관)에 도착한 1913년 3월 20일 저녁 10시 45분 괴한에게 피습당하였다. 복부에 두 발의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3월 22일 새벽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일기인 『아지역사(我之歷史)』, 사후 서혈아(徐血兒) 등이 유문(遺文)을 모아 편찬한 『송어부(宋漁父)』가 있으며, 기타 『이십세기지지나』, 『민보』, 『민립보』 등에 다수의 논술이 게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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