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
兪仁卿1896. 10. 20 ~ 1944. 3.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가족과 함께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로 이사하였고, 서울로 유학하여 1911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제5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다시 대구로 내려와 혼인하였고, 남산정(南山町) 예배당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19년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3~4월 오현주(吳玄洲)·오현관(吳玄觀)·이정숙(李貞淑)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와 최숙자(崔淑子)·김원경(金元慶)·김희열(金熙烈)·김희옥(金熙玉) 등이 중심이 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가 같은 해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총무 이병철(李柄喆)의 주선으로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이후 기독교회·학교·병원 등을 이용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회원들의 회비와 수예품 판매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19년 (음)7월 거창(居昌)·밀양(密陽)·통영(統營)을 총괄하는 대구지부장에 선임되어 조직 확대에 힘쓰는 한편, 군자금 100원을 본부에 납부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그런데 오현주 등 지도부의 독립 성취에 대한 자신감 상실로 인하여 점차 활동이 침체되어갔다. 이 무렵 만세운동의 여성계 지도자로 수감되었던 김마리아(金瑪利亞)와 황애시덕(黃愛施德)이 감옥에서 풀려나 부진 상태에 빠져있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였다. 즉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의 출감을 위로·축하하는 다과회 모임을 명분으로 이정숙·장선희(張善禧)·백신영(白信永)·이혜경(李惠卿) 등과 함께 정신여학교 김마리아의 숙소에 여성계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오랜 회의 끝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혹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본부)의 조직과 임원을 개편하였다. 조직은 결사부(決死部)·적십자부(赤十字部)를 신설하는 등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한 체제로 전환하였다. 임원은 회장에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및 편집원 황애시덕, 적십자 부장 이정숙·윤진수(尹進遂) 등으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대구지부장을 계속 맡기로 하였다. 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부(聯通府)의 역할을 대행하였고, 본부와 지부를 통해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대한총지부(大韓總支部)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힘써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그러던 중 오현주의 배신으로 조직이 탄로나, 1919년 11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 일로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미결구류일수 100일 본형에 산입)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21년 9월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강연회 등의 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여성계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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